▲ 최충식 논설위원 |
현실에 살면서 그리움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인간이다. '보문산 그린랜드 생태복원' 뉴스에 문득 꺼내본 25년 전 사진에 '본분'을 잠시 망각한 이유는 그래서다. 보관상태는 나쁘나 기억은 또록또록하다. '사랑'은 변하지만, '그리움'은 여전하고 어감 자체가 여전히 아름답다. 독일인들에게 최고 아름다운 단어라는 '디 젠주흐트(die sehnsucht)'가 얼마나 애절한 '그리움'인지도 헤르만 헤세를 좋아해봐서 좀 안다.
헤세가 아니라도, “온몸을 던져오는 거대한 파도를 몰래 숨어 해치우는” 사내를 향한 문정희의 풋풋한 그리움도 좋다. “그녀는 몸속에 우물 하나를 감추고 산다… 남자는 밤마다 두레박을 드리운다 ” 이영혜의 은밀함이 아직 싫지 않다. “나는 여자란 말도 좋아한다. 늦은 점심에 상추쌈을 싸먹는 여자도 좋아하고 남자의 차(車)에서 몸매를 추스르며 희부죽이 웃는 웃음도 좋아하고…” 여자를 찾아 '내 안에 내가 늘 부재중인' 윤석산의 그리움 또한 괜찮다.
목원대 홍희표 교수의 '하이터치 그리움'이다. 몰라보고 트로트를 연상해서 미안하다. 하이터치 로터치 내 가슴 흔들리네요 유어 터치 마이 터치 사랑에 약한 여자예요~. 그리움이 욕망으로 간주되고, 욕망은 규제된다는 플라톤적 사고에 젖은 세상, 그 위에 구제역이다 과학벨트다 복잡한데 웬 반(反)저널리즘적인 그리움? 하다가도, 어쩌다 '도심 흉물로 변한'(보도자료 표현) 보문산 그린랜드 '생태복원' 뉴스를 구실로 다시 과감히 꺼내본다.
사진이든 사람이든 불변을 기대하면 집착이고 재현의 욕망이다. 뇌를 반짝이게 했던 '푸르게 빛나던 여자'를 4반세기 전 사진으로 대하는 감상은, 누구 말대로 인간은 설명할 수 없는 것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차장이 된 추억에서보다 큰 상실감을 견디며 그런 서사적 존재임을 증명할 날이 언제 닥칠지는 모르겠다.
대전시도, 추억의 영역에서도 한동안 방치한 그 공간의 '복원'이 끝나면 이제 추억은 역사가 된다. '변하는 건 역사다. 모든 건 변한다. 고로 모든 건 역사다.' 한 장의 흐린 사진이 증명한 삼단논법이다. 다행히도 그린랜드 바나나벤치의 솜사탕 든 저 여인(지금은 '아내') 찾자고 3.6명의 네트워크를 동원해 헤맬 일은 없겠다. 휴대폰 단축번호 1번을 '터치'하면 튀어나오는, 추억이며 현실의 주인공이니까. /최충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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