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들은 여전히 읽는다. 단지 신문만 빼고'라는 미국 퓨 센터(Pew Center) 보고서의 괘씸한(?) 제목이 생각난다. '신문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의 가장 기본은 당연히 읽기다. 이왕이면 '머리 좋게 읽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그 하나로 신문을 책상 위에 쫙 펼치고 내려다보는 모 화장품 회사 대표의 독법은 점이 아닌 면으로 읽기다. 이 방식은 시대 흐름의 단면을 읽는 데 유리하다. 운 좋으면 아이디어의 뇌성이 일고 번개가 번득이기도 한다. 가만히 앉아 천리만리를 내다보고 다양한 각도에서 사실과 진실을 넘겨다본다. 편향된 외통수[외通手] 시야만 고집하는 장자의 달팽이 뿔 위에서의 피 터지는 싸움도 구경할 수 있다. 눈에 익은 가구와 같은 존재인 아내, 그처럼 아침에 눈을 떠 곁에 없으면 허전한 또 다른 존재가 신문일 것이다.
그것은 늘 새로우면서 변하지 않는 경전과도 같다. 신문은 전도서 3장에 나오는, 포옹할 때와 멀리할 때를, 그리고 얻을 때와 잃을 때, 지킬 때와 버릴 때, 찢을 때와 꿰맬 때, 심을 때와 뽑을 때, 침묵할 때와 말할 때를 넌지시 일러준다. 상허 이태준의 '책'에 '신문'을 마음대로 갖다 붙여본다. '신문을 읽는 것인가. 보는 것인가. 하면 다 되는 것이 신문이다. 신문은 읽기만 하는 것이라면 그건 신문에게 너무 가혹하고 원시적인 평가다.'
실용성을 찾자면 실로 다함없다. 긴긴 겨울밤, 노숙인들에게는 육신을 감싸는 엄숙한 이불 구실을 감당한다. 이 21세기에도 비상시엔 너끈히 화장지 구실을 한다. 물 먹는 ○○보다 뛰어난 것이 습기 먹은 신문지다. 장마철에 신발 말리기에도 더없이 유용하다. 카펫은 신문지를 깔고 돌돌 말아 보관한다. 옷에 신문지를 끼워 개키면 눅진함을 막는다. 얼룩진 창문을 닦는 데도 그만이다. 집에서 즐겨 활용하고 있는 방법들이다.
손수 기른 콩나물을 이웃과 나누면서 신문지에 싼다. 떡 싸는 데나 냉장고 식품 보관에 이만한 게 없다. 심심해서 테스트해 봤더니 기름 흡수력에서 티슈의 윗길이 '중도일보'다. 라면은 신문 간지(속장) 쪽을 펼치고 빙 둘러앉아 조금은 쪼그린 자세로 양은냄비 뚜껑에다 먹어야 제 맛이 난다. 더운 날엔 파라솔 대용이다. 통신 사진을 보니 눈발이 성기게 흩날리는 날, 한 아가씨가 우산 삼아 쓰고 젊은 아저씨는 눈을 맞은 채 뚜벅뚜벅 걸어간다. 신문을 읽으며….
신문에는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인 물음, 가치론적인 질문에 대한 답이 들어 있다. 신문의 으뜸가는 용도는 아까 썼지만 '읽는' 것이다. 잘 살기(웰빙) 위한, 사람답게 살기 위한 기사들, 다 읽고도 버릴 놈이 없다. 쓰고 쓰다 지치면 막판에 재활용 폐지로 보내거나 고물장수 비누와 맞바꿀 수도 있다. 아참, 추석 명절에 음식 만들 때, 성묘 가는 길에도 신문을, 되도록 중도일보를 휴대하면 쓰임새가 긴요하다. 끽긴하다. 이 친절한 매체를 외면할 것인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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