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육까지 곁들여 배가 두둑해진 현생인류의 잡생각은 밑도 끝도 없었다. 그들도 서로 좋은 돌멩이를 차지하겠다며 싸우고 빼앗고 훔쳤을까. 구석기인이 보기에 우리는 돈의 노예이지 않을까. 외계인의 눈엔? 또 동물의 눈엔? 성(性)의 대가로 돌멩이를 주고받는 아델리펭귄의 눈에는 어떻게 비칠까. 돌멩이를 잔뜩 소유한 바람둥이 수컷, 진흙천지에서 보송보송한 새끼 둥지를 위해 가외의 돌멩이를 정조와 바꿔 뒤뚱뒤뚱 귀환하는 그 펭귄의 모성본능을 우리가 비웃을 자격이나 있는가.
생각은 꼬리를 물어 석기시대적 삶을 고수하는 현재로 중첩된다. TV 다큐멘터리로도 소개됐지만, 남태평양의 작은 섬 바누아트에 가면 지금도 전통은행에 돼지이빨 꾸러미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거치고도 90%가 지금 돼지이빨 화폐를 고수하며 시장교환(물물교환)을 한다. 아무리 뜯어봐도 풍족함을 모르는 그들이 지구상 행복지수 1위를 차지한 것도 신기하다.
거기서는 위조지폐도, 쉽게 번 돈을 쉽게 쓰는 공돈효과도 없다. 비움의 미학보다 채움 속에 사느라 인생이 없고 돈만 있는 사람들에게 죽비가 될 만한 얘기다. 지난 11일 입적, 어제 49재 초재(初齋)가 치러진 법정 스님의 몸으로 보여준 실천 역시나 시대를 일깨우는 대빗소리 같다. 스님의 일생은 마치 '안온함을 얻은 성자들은 소유를 버리고 떠난 것이다'라는 숫타니파타의 구절을 연상시킨다.
그분이 이끼 낀 돌멩이 하나를 방안에 들여 한 겨울동안 물을 주다가 봄의 개울소리에 깨닫고는 원래 자리에 돌려놓은 것도 특유의 '무소유의 소유' 계열이다. 군더더기를 버리고 버리며 없애고 없애다 금생을 홀가분하게 마무리한 법정 스님과 차고 넘쳐도 부족하고 더 소유하지 못해 안달인 우리가 시공간에 함께 머물렀던 인연, 이는 축복일 것이다.
법정 스님이 불일암에서 『서 있는 사람들』을 집필할 즈음이었다. 아직 혈기방장한 10대였고 조숙했던 나는 어떤 일을 완성하려 작심하고 같은 산줄기 대각암에서 한 겨울을 머물렀다. 다만 여기서 스님이 권한 '시장기 같은 외로움'을 느껴본 사실을 밝히기란 부질없다. /최충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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