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과학분야 석학들이 국내 정부출연연구기관을 진단한 후 이같이 처방을 내렸다.
특히 연구 프로젝트별로 예산을 부여하고 출연연들이 이들 따내기 위해 경쟁하는 연구과제중심제도(PBS)가 국내 과학기술 발달의 가장 심각한 '독'으로 지적됐다. 같은 연구원내에서조차 경쟁이 치열한 구도를 만들어 연구팀간, 연구원간 협력을 막고, 프로젝트를 쫓아가는 연구를 하게 만듦으로써 독립적이고 안정적인 연구를 막아 결과적으로 국내 과학기술 도약을 가로막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교육과학기술부 산하 기초기술연구회(이사장 민동필)는 소관 13개 정부출연연 중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등 5곳을 대상으로 지난해 실시한 국제진단 결과를 최근 발표했다.
▲연구수준 '세계적', 관리 시스템 '문제'=기관 진단에는 로버트 싱클레어 미 스탠퍼드대 교수, 홀스트 사이먼 미 로렌스버클리국립연구소 부소장, 울프 네르바스 한국파스퇴르연구소 소장, 기 브라세르 벨기에 국립대기연구센터 부소장 등 세계적인 석학들이 참여했다. 생명연 진단위원장을 맡은 울프 네르바스 소장은 “한국의 연구수준은 미국, 유럽과 비견할 정도로 높은 수준으로 평가됐지만 프로젝트별 펀딩 방식은 심각한 문제점으로 지적됐다”고 밝혔다.
네르바스 소장은 “모든 연구원이 정부에 개별적으로 연구펀드를 신청하는 구도이고 연구원 내에서조차 특허나 논문 경쟁이 너무 치열한 상황이다 보니 협력연구나 장기적이고 창의적인 연구가 힘든 구도”라며 개선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예산이 주어지는 분야에 연구자들이 몰리다 보니 연구자가 전문분야에 몰입해 장기연구를 하지 못하고 연구주제를 자주 바꾸게 되고, 결과적으로 연구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
네르바스 소장은 “정부가 연구원에 자유 재량을 주고 연구원이 자율적으로 쓸 수 있는 예산을 줘야 하며 그래야 창의력이 늘어나고 연구협력 환경이 가능해 질 것”이라고 말했다. 또 “정부는 연구 평가시 기본연구냐, 서비스냐, 연구분야가 어떤가와 상관없이 같은 평가 척도를 이용하고 있는데 분야별로 평가방식이 달라야 한다”고 지적했다.
▲연구 네트워킹 확대돼야=5개 기관의 진단위원들은 연구역량이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했지만 내부협력을 통한 대형과제 도출방안과 과학 전략계획의 자문을 위한 과학자문위원회 설립이 필요하다고 공통적으로 지적했다. 또 지나친 논문·특허를 유발하는 평가시스템이나 PBS식 연구비 지원을 지양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기관별로 KISTI는 신경과학, 연료전지 등 두 개 수월성센터에 초점을 맞추고, 기술적으로 중요한 분야에 선택·집중하는 전략을 강화하는 한편 해외 신진연구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할 것을 권고했다. 생명연은 연구성과와 특허 등록 개수가 탁월하고 산학연 네트워킹이 활발한 반면 내부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하고 장비 활용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KISTI는 서비스 제공자에서 가치 제공자로의 변화, 중소기업과의 상호작용이 필요하다는 진단이 도출됐다. 해양연은 세계적인 위상을 높이기 위해 국제협력을 보다 강화하고, 예산 대비 정직원 비율을 높일 것을 권고했다. 극지연구소는 보유한 연구인프라를 최대한 활용하도록 국내 대학, 출연연 등과 협력하는 게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민동필 이사장은 “이제는 우리나라가 세계과학기술 선진국으로의 도약을 준비해야 하는 시점으로 과학기술 수준에 대한 보다 정교하고 객관적인 분석을 통해 연구수준을 진단, 향후 발전 방향을 모색해야한다”며 “연구원들이 서로 만나고 하는 일을 잘 알리는 기회를 늘리고, 독립적이고 안정적인 연구환경을 제공할 수 있도록 정부와 협의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처음으로 국내 출연연이 해외 과학계 인사들로부터 국제진단을 받은 것으로 연구회는 올해 나머지 8개 출연연에 대한 진단도 실시할 방침이다.
이를 통해 국내 과학기술 수준을 보다 객관적으로 분석해 연구수준을 진단하고 향후 발전방향을 모색한다는 게 연구회의 구상이다. /배문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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