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출신 첫 한화이글스 사령탑에 오른 소감은.
▲동국대에서 감독으로, 삼성에서 6년간 코치로 지도자 경험을 쌓았습니다. 선수든 코칭스태프라면 누구나 프로구단 감독직을 꿈꾸기에 정말 하고 싶었습니다. 대전 출신 감독은 처음이어서 영광스런 자리라고 생각하지만, 부담감과 책임감도 많이 통감하고 있습니다.
-`스타 플레이어는 감독으로 성공하기 어렵다'는 징크스 깰 비책은.
▲눈높이를 자신에 맞추면 힘들다고 봅니다. 쉽지않은 과제이기도 합니다. 동국대 감독 시절, 선수들의 기량이 눈에 차지 않았습니다. 눈높이가 맞지 않았습니다. 당시 대학 실장에 재직 중이던 선배가 수차례 눈높이를 낮추라고 조언했고, 선배의 충고를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삼성 코치 재임 때도 주전보다는 백업 선수에게 신경을 많이 썼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야구와 인연을 맺게된 계기가 있다면.
▲신흥초 4학년 때(1971년) 씨름과 배구의 맛을 보며, 운동과 연을 맺었습니다. 그러던 중 5학년 때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체육대회(오랜된 일이라 대회명은 잘 기억이 안난다고 함)에서 투창 선수로 나갔는데, 남들보다 멀리 던졌나 봅니다. 이 모습을 본 당시 야구부장님 등이 `야구를 해보는게 어떻냐'고 권했고, 투수로 시작한 야구인생이 오늘에 이르게 됐습니다.
-집안의 반대는 없었나요.
▲양말과 신발이 금세 헤진 상태로 들어오니 집에서도 반길리 없었습니다. 반대가 심했지만, 부모님도 저의 의지를 꺾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뒤에는 학교 훈련보다 더 강도높고(?) 혹독한 시련이 뒤따랐습니다. 두분 다 6·25 전쟁 당시 이북에서 피란온 분들이라 생활력이 무척 강했습니다. 동국대 2학년 재학 중이던 1980년 5·18 광주 민주화항쟁 시기로 기억합니다.
계엄령 때문에 팀 훈련에 참가하지 못하고, 대전에 내려와 있었습니다. 한창 놀 나이였는데, 아버지는 아들이 해이해지는 모습을 보기 싫었나 봅니다. 매일 새벽4시만 되면, 본인은 오토바이를 타고 저는 발로 뛰면서 보문산 산행에 나서야했습니다. 안 일어나면 세숫대야 물을 얼굴에 확 끼얹기도 하셨습니다.(웃음) 무식하게 저를 다루셨지만, 그 당시 아버지의 교육이 저를 강하게 만든 것 같습니다.
-해결사 칭호를 얻게된 시점은 언제부터인지.
▲국민 모두가 기억하는 것처럼, 1982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일본과 결승전 때 붙여진 칭호입니다. 원래 중심타선이 아니었는데, 컨디션이 좋다고 판단한 어우홍 감독이 저를 5번 타선에 올리면서 기회를 얻게 됐습니다. 한마디로 운이 좋았습니다. 3점 홈런과 인연도 이때부터 시작됐습니다. 1983년 프로 데뷔 처음이자 개막전 첫 홈런의 주인공이 됐고, 이때도 3점 홈런이었습니다. 이후 중요한 경기의 고비 때마다 3점 홈런을 쳤고, 1988년에서 1992년까지 5년간 해태의 기라성같은 선배들 틈에서 4번 타자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시련의 시기는 없었나요.
▲1983년 OB베어스 입단 후, 개막전 3점 홈런을 치는 등 88경기에서 타율 0.272, 43타점을 기록하며 순조로운 출발을 보이는가 했습니다. 하지만 다음해 성적이 나빠졌고 간염에 시달리면서, 3년간 이렇다할 활약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1986년 트레이드 얘기가 나오면서 대전 연고인 빙그레이글스 이적을 요청했지만, 결국 해태로 이적됐습니다. 트레이드를 거부했고, 프로야구 최초의 임의 탈퇴선수(60일 자격정지)라는 불명예(?)스런 칭호를 얻게 됐습니다.(웃음) 은퇴까지도 고민했지만, 당시 20만원 상당의 투구 기계와 볼, 웨이트기구를 사들고 대둔산 칩거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해태의 수석코치로 부임한 김인식 감독님을 대전에서 만나 커피 한잔하면서 해태와 인연을 맺게 됐습니다. 25년간 원하지않았던 타지 생활을 하게됐지만, 결과적으로는 야구인생에는 도움이 된 셈입니다.
▲감독 부임 직후 선수들과 주위 얘기를 많이 들어봤습니다. 구단과 코칭스태프, 선수간 소통이 많이 부족한 문제를 발견했습니다. 중간역할인 코치들 역할이 중요합니다. 젊은 선수 중심으로 일본 교육리그를 내보냈는데, 코칭스태프에게 특히 강조한 부분이 있습니다. `시합 후 얘기를 많이하고, 질책보다는 애정이 담긴 발전적인 지적을 반드시 하고 넘어가라'고. 연습 때 작은 실수도 허용하지않는 철두철미함이 실전에서 빛을 발하기 때문입니다.
-최근 코칭스태프의 일부 변화가 있었는데.
▲코칭스태프 개편은 마무리 단계에 와 있습니다. 1루와 2루 수비코치 선임만 남은 상태입니다. 포스트시즌 종료 후 본격적인 영입전에 나설 계획입니다. 기본적으로 코칭스태프가 잘 뭉쳐야, 선수들을 잘 이끌고 갈 수 있다고 봅니다. 쌍방울레이더스에서는 선수로, 삼성에서는 코치로 함께 생활한 이종두(47) 수석코치를 중심으로 장종훈과 강석천, 정민철 등 기존 코치진과 조화를 이뤄낼 계획입니다. 지역의 출신학교 후배들을 편애한다는 오해를 받지않도록 노력하면서, 최상의 조합을 찾고 있습니다.
-내년 시즌 목표가 있다면 말씀해 주시죠.
▲성적은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성적을 말하기보다 팀에 변화를 주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젊은 투수진의 안정된 투구력 확보가 시급합니다. 올해 좋은 성적을 거두진 못했지만 많은 공을 던진 김혁민과 유원상, 안영명에게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공격적인 야구의 장점은 최대한 살려나갈 것입니다. 다만 부족한 수비력과 주루 플레이를 보완하는데 많은 공을 기울일 생각입니다. 발이 느리더라도 진루 후 한 베이스라도 더 가려는 노력이 필요한데, 한화 선수들에게는 이 점이 부족했습니다. 훈련량을 늘려야할 필요성을 피부로 느꼈고, 스프링캠프 기간 선수들에게 많은 요구를 할 생각입니다.
-SK 김성근 감독과 인연이 있다고 하던데.
▲김성근 감독님과는 1984년 OB베어스 시절 감독과 선수로 인연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좋지않은 인연이었습니다. 데뷔 첫해인 83년 비교적 무난한 활약을 펼쳐 보였지만, 김성근 감독이 부임한 84년부터는 성적이 좋지않았습니다. 그해 겨울 간염에 걸리면서, 85년에는 아예 시합을 거의 못뛰었습니다. 감독님한테 완전히 찍혔고, 트레이드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두산 김경문 감독과 김성근 야구를 넘어서자는 결의(?)를 세웠다는데.
▲김경문 감독과는 1983년부터 OB베어스에서 선수생활을 같이 했습니다. 지난달 한화 감독 내정소식을 들은 김 감독이 가장 기뻐하며 축하해줬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스승인 김성근 감독의 야구를 반드시 넘어서자'는 얘기를 주고받았습니다.
[한대화 감독 프로필 및 약력]
▲생년월일 : 1960년 7월8일
▲출생지 : 대전 동구 인동
▲취미 : 영화감상
▲학력 : 대전 신흥초-한밭중-대전고-동국대
▲선수 경력 : 국가대표(78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OB(83~85), 해태(86~93), LG(94~96), 쌍방울(97)
▲코칭스탭 경력 : 동국대 감독(98~2003), 삼성라이온스 수석코치(2004~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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