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살리기’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각종 개발 사업으로 금강이 커다란 변화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취임 1년을 맞은 변평섭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장으로부터 금강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와 중요성, 바람직한 미래상 등에 대해 들어봤다. <편집자 주>
-최근 금강살리기가 단연 뜨거운 화두 중 하나가 아닐 수 없다. 역사문화연구원에서도 이 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안다. 충청지역의 역사에서 금강을 때어 놓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라 본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금강이 충청인에게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역사적으로 본다면 금강에는 웅진과 사비성이 입지하고 있고, 백제 패망기 기벌포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기도 하다. 또 조선시대에는 예학(禮學)으로 대표되는 기호유학의 전통이 금강변의 연산과 노성, 회덕 고을을 배경으로 형성됐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조선 후기 우리나라 3대 장시였던 강경을 비롯해 규암과 공주, 그리고 미호천과 금강이 만나는 부강 포구 등은 충청민의 먹거리를 담당하던 통로였다.
다시 말해 충청인의 삶과 문화, 그리고 역사가 금강에 그대로 녹아 있는 것이다. 그만큼 금강을 제외하고는 충청지역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거나 이야기 할 수 없다는 얘기다.
-강이 가진 본래의 기능과 특성은 비슷하지만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생성된 특성 같은 것이 있을 법하다. 금강이 가지는 고유한 특성이 있다면 무엇이라 할 수 있나.
▲어느 지역이나 그 지역을 대표하는 산과 하천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서울에는 한강이 있고, 제주도에는 한라산이 있다. 충청지역에는 바로 계룡산과 금강이 있다. 우리 지역에서 이 산과 강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크다. 특히 금강은 생태ㆍ환경적 측면에서도 많은 특성을 지니고 있지만 전문가가 아닌 입장에서 답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다만 역사ㆍ문화적 측면에서 이야기 한다면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금강은 오랜 세월 지역의 역사와 경제 흐름의 중심에 있었다.
옛 백제로부터 조선시대 유학의 전통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이 금강을 따라 도입되고 확산됐다. 나아가 이것들이 뱃길을 따라 일본으로 전파되는 통로가 되기도 했다. 금강을 따라 물길이 서해로 나가면 노를 젓지 않아도 조류에 의해 일본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예로 따지면 금강은 교역을 위한 중요한 통로 였던 셈이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 경제 활동 등 어느 것 하나 금강을 빼고는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다. 자연스레 그 모든 것이 금강과 그 주변의 모습을 형성하는 특성이 된 것이라 하겠다.
▲현재의 하천 환경을 돌아보면 방치에 가깝다는 느낌이 든다. 주민들이 잘 접근하지 않고, 친숙하지도 않은 공간으로 인식돼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탓에 쓰레기 하치장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곳도 많다.
중하류는 수심이 70㎝ 정도에 머물러 하천이라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다. 단지 멀리서 바라보고, 경관만을 가지고 현재 금강의 상황을 판단하기 힘들 듯 하다. 기본적으로는 주민들에게 주어진 공간이 아니었던 까닭에 지금과 같은 결과를 빚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4대강 살기리의 기본 취지는 하천을 하천답게 만들고, 주민이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해 나가는 것이라 본다. 그 과정에서 소중한 역사문화자원을 훼손하는 일은 없으리라 믿는다. 오히려 역사문화자원은 하천을 주민들에게 친숙한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가장 먼저 활용해야 할 소중한 자산이자 소재가 될 수 있다. 강변에 위치한 수 많은 유적과 강의 옛 지형을 무시한 인위적인 개발만 이뤄지지 않는다면 문화재의 훼손을 우려할 필요는 없을 것으로 본다. 만약 그런 문제가 발생한다면 우리가 먼저 나서 저지하는데 힘을 모을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금강의 미래상은 어떻게 그려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나.
▲기본적으로 금강은 있는 그대로 충청인의 역사가 흐르는 강이자 주민들에게 친숙한 공간이 돼야 한다. 거기에 한 가지 더해 방문객 또는 관광객에게 자랑스럽게 보여 줄 수 있는 강이어야 한다.
그것은 다름아닌 금강의 역사와 문화를 되짚어 보고, 철저한 조사와 고증을 거쳐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미래상을 그려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고 본다.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역사문화적 전통을 담은 사업이 이후 금강 개발에 포함돼야 하고, 이를 낙후된 충남 서남부 권역의 성장동력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금강살리기를 위해서는 하구둑을 헐어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 강의 옛 기능이 살아날 수 있으며, 강경과 서천, 장항 등 쇠퇴한 지역들이 살 수 있다.
-금강을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는 강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의 역할도 중요할 것 같다. 금강살리기와 관련해 연구원 입장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할 계획인가.
▲가장 기본적으로는 정비사업을 위한 사전 문화재 조사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으로 본다. 하지만 단순히 소극적으로 문화재 조사를 수행하는 것 만으로는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고 본다.
금강의 역사와 문화 전반에 대한 조사연구를 통해 향후 전개될 금강살리기 사업의 구체적인 컨텐츠를 제시하고, 이 자원이 활용될 수 있도록 할 생각이다. 금강문화관 건립사업을 제안한 바 있는데 동일한 고민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금강살리기 사업과 관련해 다양한 조사연구와 창의적인 제안을 해 나가도록 노력할 것이다.
-질문을 바꿔 개인적으로는 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에 취임하신지 1년이 지났는데 오랜 언론계 생활을 접고 새로운 길을 걸으신 지난 1년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43년간 몸 담았던 언론계 생활을 접은 셈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언론계에 있는 동안에도 한결같이 충청과 백제의 역사ㆍ문화에 많은 관심을 갖고 그것들을 발굴 정리하는데 주력해 왔다. 그래서인지 새로운 일이라기 보다는 관심갖고 해오던 일을 이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물론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기관의 책임자가 되고보니 생각보다 그 책임이 막중하다는 생각이 든다. 미처 깨닫지 못했던 우리 역사의 장엄함 앞에 자연히 겸손해 질 수 밖에 없다.
그런 가운데도 한 해 동안 참 많은 일을 시도했다. 백제문화사대계 편찬을 완결했고, 아메미야 히로스케 기증유물 전시를 비롯해 한ㆍ일 백제문화심포지엄과 한ㆍ중ㆍ일 국제학술회의 등 굵직한 행사들을 개최했다. 찾아가는 박물관 처럼 작지만 의미 있는 시도도 있었다. 취임 이후 전에 없던 새로운 시도를 다양하게 펼치며 자신감도 얻게 됐다.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만큼 연구원의 역할과 위상도 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연구원의 역할과 과제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나.
▲백제문화와 조선시대를 이끈 기호학파의 중심지로서 우리 지역의 문화를 ‘문화가 경쟁력’인 이 시대에 맞게 새롭게 접목시키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금강살리기도 역사문화적 관점을 어떻게 조화시키고 살려낼 수 있을까 하는 부분에서 우리의 역할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올해 중점을 두고 있는 사업 중 하나가 ‘우리 문화유산 찾기 운동’이다. 망실이나 훼손 위기에 있는 국내ㆍ외의 유적ㆍ유물을 찾아 보존하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확대할 생각이다. 지난해 일본인 아메미야 히로스케씨로부터 유물 382점을 반환 받은 것은 큰 성과였고, 올해도 학계가 놀랄만한 유물의 반환ㆍ기증을 추진하고 있다. 이 운동을 계속 확산해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을 되찾을 것이다.
※변평섭 원장은?
1940년 생. 충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공주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5년 대전일보에 입사해 논설위원과 편집부장 등 거쳤으며, 중도일보 편집국장과 주필ㆍ대표이사 등을 역임했다. 충청투데이 회장을 끝으로 오랜 언론 생활을 접고 지난해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장에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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