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과밖]사냥꾼이 채집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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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과밖]사냥꾼이 채집자에게

  • 승인 2008-12-24 00:00
  • 신문게재 2008-12-25 21면
  • 최충식 논설위원최충식 논설위원
캐럴이 잘 들리지 않은 썰렁한 거리에서 글로벌 불황을 실감한다. 상점에는 ‘립스틱 효과’가 조용히 재연되고 있다. 고가의 자동차나 가구 대신, 립스틱처럼 작고 값싼 사치품 구매가 늘어난 것이다. 점심은 구내식당에서 먹고 커피는 전문점에서 우아하게 마시는 ‘된장형’ 소비 불황도 여전하다.


우리네 삶은 각종 기념일들로 가득 차 있다. 현실과 환상의 문턱에서 우리는 그 날을 기념하려고 기억이라는 도장을 찍는다. 이를 위해 때로는 돈을 펑펑 쓰기도 하며 원치 않은 임신을 하거나 아주 드물게는 목숨을 걸기도 한다. 성탄절도 그런 기념일의 하나인데 예년 같지는 않다.

앞서의 립스틱 효과와 된장형, 두 유형 다 여성이 주인공이다. 쇼핑의 역사는 여성의 역사와 뗄 수 없는 동반자적 길을 걸어왔다. 그걸 모르는 남성은 투덜대며 카트를 밀고 따라다닌다. 남성이 느끼는 쇼핑 스트레스 강도는 시위를 막는 진압경찰의 스트레스와 맞먹는다. 뇌가 호랑이를 만났을 때의 상태를 보이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홀아비로 오인받을 정도로 진지하게 쇼핑을 하는 편이라 이러한 사정을 잘 이해하는 편이다. 쇼핑은 사물을 보는 안목과 함께 책과 지표에서 읽은 경제감각을 몸으로 익히는 데도 도움을 준다. 오만 가지 짐승과 과일이 빽빽이 들어찬 야생의 숲을 거니는 것은 쉽게 포기 못할 즐거움이다.

쇼핑 스타일의 차이 역시 사냥과 채집을 남녀가 역할 분담한 데서 나왔다는 입장에 대한 지지도 내 오랜 경험에서 나왔다. 남성이 덩치 큰 표적을 추적하던 버릇에서 원하는 물건을 곧바로 사는 방식을 취한다. 여성은 포도를 따다 딸기가 눈에 띄면 주워담듯, 또 곡식과 뿌리를 찾듯 가족을 위한 찬거리를 장만한다.

그러다 습관이 된 것이다. 물건을 안 사고 못 배기는 오니오마니아(oniomania)의 90%가 여성이다. 쇼핑 중독은 열심히 채집 다니던 습관의 답습이다. 이혼할 때도 남성은 자동차, 컴퓨터, 카메라를 가지려 하고 여성은 살던 집, 애완동물, 앨범을 갖고 싶어한다. 남성이 목적지향이면 여성은 관계지향이다. 수다떨며 매장에서 나오는 여성의 행복한 표정을 봤다면 도살장에 끌려온 소 같은 뜨악한 표정을 지을 필요 없다.

쇼핑할 때도 남성은 편리성과 필요에 초점을 맞춘다. 원하는 사냥감을 머리에 새기고 망설이지 않는 사냥꾼의 모습이다. 채집자인 여성은 쇼핑 자체에서 즐거움을 얻고 매장에 머무는 시간이 길다. 남성은 평균 72분을 견디며 여성은 그보다 28분을 더 즐기며 쇼핑한다. 이 마(魔)의 72분을 못 참는 남성을 맡겨놓는(?) 전용 휴게실이 일부 백화점에 생기기 시작했다. 여성의 쇼핑을 방해하지 말라는 눈물겨운 배려다.

여성은 소비재의 83%를 구매하는 영향력 있는 소비자다. 채집할 물자가 넘쳐나는 원시림에서 건전한 쇼핑의 유혹마저 참는 이들 수집가들에게 사냥꾼들은 미안히 여겨야 한다. 여성에게 쇼핑의 의미는 여행이나 레저와 다르지 않다. 경제 원칙에 입각한 합리적인 소비조차 못하고 있는 여성이 쇼핑의 자유를 누릴 그 날을 위해 경제여, 활활 살아라. 할 수만 있다면 오늘, 작은 사치품 하나로 여성들을 위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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