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과밖]쌀독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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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과밖]쌀독이 그립다

  • 승인 2008-12-17 00:00
  • 신문게재 2008-12-18 21면
  • 최충식 논설위원최충식 논설위원
‘타인능해(他人能解)’ 글귀가 쓰인 뒤주를 가졌던 부자가 또 생각난다. 끼니를 거른 사람은 누구든 능히 쌀을 퍼갈 수 있다는 쌀뒤주였다. 나눔의 쌀독이 대전, 대구를 찍고 부산에 등장했을 때가 있었다. 대전 부사동에서 시작된 운동이 퍼져 전 동사무소에 쌀독을 비치했던 그때가 불과 3년 전이다.


지금은 주민센터
로 변한 동사무소 한켠에 놓아둔 쌀독은 매달 2가마 이상 분량이 들고 날 정도로 참여와 호응이 컸다. 책 속의 십시일반(十匙一飯)이 생활 속에 살아난 듯해 보기 흐뭇했다. 베풂의 가치는 크기나 외양의 화려함에 있지 않았다. 부뚜막에서 쌀 한 줌씩을 단지에 덜어냈다가 이웃과 나누던 전통과도 유사한 손길에서 진정한 나눔의 미학을 엿볼 수 있었다.

그 운동은 남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이웃의 자존심을 다치지 않으면서 잘 발전되나 싶었다. 쌀독에는 잔잔한 어머니의 마음이 흘렀다. 빵이 부성이면 밥은 모성이란 확신도 그때 들어, 각 동 복지만두레의 쌀독이 바이러스처럼 전국 읍·면·동에 전파됐으면 했다.

그리고 매일의 인사인 “밥 먹었냐?”가 정보화사회에도 계속되길 바랐다. 중학교 때의 평화봉사단원 스튜어드를 빼고는 밥 먹었는지 묻는 외국인을 본 적이 없다. 외국인 한국어 말하기 대회에 나온 한 일본 유학생은 “ ‘밥 먹었어?’가 마음과 몸과 생활을 걱정해주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말”이라 했다. 뭐든 먹으면서 살아온 국민답게, 우리는 나이조차 취(取·일본)하거나 보태지(添·중국) 않고 ‘먹는다’

이토록 먹는 것, 밥을 중시하고 거의 신성시한 차원으로까지 격상시켰던 만큼 남 배곯는 사정도 잘 안다. 중국인이 쌀을 ‘보살(菩薩)’로도 쓰지만 우리만큼은 아니었다. 밥은 산 자와 죽은 자 간 의사소통에도 쓰인다. 삼신주머니에 쌀을 넣으면 그대로 신앙 대상이었다. 음복(飮福)의 이름으로 밥을 나눠먹는 제사는, 빵을 “내 몸이니라” 하며 “나를 기념하라” 하는 종교의 성찬식을 닮았다.

함께 더불어 밥
먹으면 식구(食口), 한솥밥을 먹으면 직장 동료다. 동료(companion)란 함께(com) 빵(panis)을 나누는 사이라고 했다. 밥상이든 제상이든 적과는 음식을 트지 않는다. 음식을 거부하면 적의의 표시일 수 있고, 같이 먹는다는 것은 생존본능만이 아닌 행위 양식의 공유이기도 하다. 쌀독에 내가 눈독을 들인 것은 이런 점 때문이었다.

나눔의 그 쌀을 보면, 80㎏ 한 가마에 200만원 하는 쇠똥구리 유기농 살이 안 부러웠다. 그렇게 익명의 후원자와 수혜자의 정이 오가던 나눔의 쌀독이 어쩌다 슬금슬금 자취를 감추고 있다. 끊긴 지원금 때문이라고도 하고, 아무나 퍼가서 직접지원으로 바뀌었다고도 하지만, 다른 정치적인 이유를 대기도 한다.

어떤 이유에서건 공동체 문화를 선도하는 대표 복지프로그램으로 평가받던 쌀독이 불신의 독이 된 상황이 아쉽다. 이웃사랑은 휘황한 사회복지사업으로만 구현되지 않는다. 쌀독이 사랑의 쌀뒤주로 영원히 비워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은 변함 없다. 어제도, 쌀봉투를 이웃에 전달하는 모습에서 대전의 후한 쌀독 인심의 부활을 한 번 그려봤다. /최충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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