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언제라도 당신의 것이 될 수도 있다. 먹을 것을 찾아 배를 채우고
암컷을 차지해 번식을 해야 하는 그 숙명 뒤에도
싸움은 끝없이 이어지며 그 뒤엔 노쇠와 몰락이 찾아온다.
무심코 따라 읊
진술, 정황이야 어떻든 그가 저질렀다는 잘못은 무죄추정의 원칙(헌법 제27조 4항, 형사소송법 제275조의 2)에 따라 아직 혐의이지 죄가 아니다. 그러나 이 모두,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던 옛 미국 대통령을 업어친 봉하대군이 자초했다. 이웃집 처녀와 ‘나’ 사이처럼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의 관계를 기자들과 유지 못한 책임 역시 그에게 돌아간다.
못 먹고 사라진 음식을 너 먹었지, 들이대는 억울함은 세상에 없어야 한다. 하지만 “권력 없는 대군(大君) 어딨어?”가 일반의 정서이고 민심이란다. 마약보다 센 권력을 업고 호가호위할 개연성을 의심받은 대통령의 형, 해서 쏠린 언론이라는 무엄한 메커니즘의 비인간성을 먼저 이해할 쪽은 봉하대군인 걸 어쩌겠나. 전직 대통령 주변을 먼지 털 듯 턴 표적수사이더라도 법 앞에선 어쩔 수 없다.
구속된 노건평씨
어느 정도는, 언론은 소문을 먹고사는 산업이다. 까면 깔수록 속 드러나는 양파 같은 모습은 언론엔 매력 포인트다. 스타킹보다 질긴 스토킹 같고 쫀쫀한 고자질 같은 것들이 변화를 이끌기도 한다. 기자가 연재소설 늘려 쓰고 검찰이 줄거리 내다 판다고 생각하건 말건 자유다. 봉하마을에 기자들 ‘죽치게’ 한 장본인이 누구였나. 언론을 ‘×파리’라 침 뱉기 전에, 그 파리는 × 있는 곳에 득시글대지 않던가.
이미 무익한 가정이지만 봉하대군 노씨가 세종대왕의 형 양녕대군처럼 권력에 얼쩡거리지 않았다면 언론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검찰 논리라면) “중매서는 것도 죄냐”며 결백을 주장하는 봉하대군은 ‘설’ 푸는 언론을 책망할 시간에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세종증권 커넥션에 죄가 있든 없든 부적절한 처신 탓이 크다.
그리고 언론은 원래 동네북이다. 아니, 공인된 동네북을 치는 곳이다. 춥춥스럽게 달려드는 파리 떼 같더라도 원망 말기 바란다. ‘언론 없는 세상’을 바라는 형님 대군의 편견이 불과 몇 달 전 기자실에 대못 박고 퇴임한 동생 대통령의 편견과 겹쳐지는 오늘이다. 기자 노릇이나 대통령의 형 노릇이나 쉬운 듯 어렵다. /최충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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