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에 본
더 인상적인 것은 엔딩 장면에 어마어마하게 크게 찍힌 ‘공부’!(‘쿵푸’는 ‘工夫’의 중국 발음을 영어식으로 적은 것이고 가까운 중국 발음은 ‘공푸’와 ‘궁푸’의 중간음.) 느려터진 곰탱이가 ‘내 안에 잠재된 나’를 일깨워 쿵푸 마스터로 성장한다는 판에 박힌 설정까지 신선했다.
팬더가 쿵푸를 배우는 과정에 보여준 사제간의 목표 공유나 학습에 대한 진지한 자극과 열정, 점수에 집착하는 현실 세계와는 어우러지지 않지만 목표는 과정 중에 성취된다는 공부법도 마음에 든다. 갈고 닦는다는 생리에서 무술 수련과 머리 공부는 같다. 무술이 우슈(武術), 공부가 쿵푸(工夫)인 것. 공자의 쿵푸는 사람다움(仁)의 실천이며 맹자의 쿵푸는 흐트러진 마음을 모으는 구방심(求放心)이다.
현재의 다의적인 ‘공부’는 송대 성리학자들이 쿵푸를 학문 수양에 썼고 조선의 학자들이 이를 수용한 터전 위에 쌓이고 쌓인 것이다. 주위를 보면 공부 아닌 것이 없다. 이소룡이 발정기 고양이 소리를 내며 날렸던 몸짓이 쿵푸였다. 교실 쿵푸도 하는 선수도 기르겠다고 기염만장이지만 축구선수의 쿵푸는 ‘열공’(열심히 공 차자)이다. 붕어빵 아주머니의 빵 굽는 기술이 쿵푸이고 시립교향악단의 연주가 쿵푸다. 세속 공부가 싫어 절집에 가도 “공부 어떠신가”가 인사로 돌아온다.
그런 면에서 우
이런 각박한 매뉴얼이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전에는 한가(스콜레)한 사람이 하던 공부였다. 쿵푸라는 말에도 ‘한가’와 ‘여유’가 녹아 있다. 그래서 생각 같아선 속 빈 강정 같은 학위보다 놀이의 달인 호모 루덴스, 예술의 달인 호모 아르텍스,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의 산상에 우뚝 올라 장풍 팡팡 쏘며 놀고 싶다.
공자께서 뭐라 하시겠지만, 쿵푸란 정신의 노예 대신 자유민으로 만드는 것임을 나이 오십이 넘고서야 알아챘다. 하버드도 옥스퍼드도 갈 수 없고, 쿵푸가 더이상 “사회적 신분을 끌어올리는 마지막 보루”(12일자 WSJ 기사 표현)가 아닌, 기계의 마음(機心)으로 변해버린 지금에야 간신히 득도하다니! /최충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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