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당신의 양심도 버리시겠습니까?”, “당신의 양심을 비춰보세요”라는 호소가 잘 먹히지 않아 양심불량의 거울이 되고 있다. 필자는 이 양심거울을 보는 편인데, 주로 미용실에서 나올 때마다 머리가 잘 잘렸는지 넥타이가 비뚤어지지 않았는지 살피는 순수한 용도에 국한한다. 자아 관찰, 존재 관찰의 ‘감(鑑)’은 못 되고 그저 낯을 비추는 ‘경(鏡)’의 수준이다.
사람 모습을 그대로 보이는 충실한 원리를 배반하지 않았다는 속성에서는 양심거울도 예외가 아니었다. 물론 어느 경우든 72만원 상당의 이 거울이 본래 기능을 다하지 못했긴 마찬가지다. 양심거울 덕에 무단투기가 사라졌다는 곳도 있지만 처음의 신비감은 저만큼 달아난 느낌이다. 비벼주는 전주비빔밥이 맛있냐, 안 비벼주는 비빔밥이 더 맛있냐가 각자 입맛에 달렸듯이, 생각 나름이라면 할 말은 없다.
도리어 양심에 반해 자신의 자유를 회복하는 도구로나 쓰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양심과 안면 몰수하기로 작심하면 양심거울을 아무리 번쩍번쩍 닦아놔도 하찮은 장식품에 그친다. 원래 4차원의 양심거울은 우리 마음속에 간직하며 살기 때문에, 양심거울을 마치 옛 제사장들의 신령한 거울처럼 무단투기 해결사로 믿을 게 못 된다. 그럴 용도라면 그 자리에 고성능 감시카메라로 대체하는 게 효과적일지 모른다.
CSI 효과라는 것이 있다. 드라마 속 CSI(Crime Scene Investigation) 과학수사대는 모든 범죄 해결이 사흘이면 끝난다는 환상도 심어줬다. 그래서 쩍하면 현실 속의 우리 경찰이 도매금으로 억울한 욕을 먹기도 한다. 양심거울이 그 같은 오해를 살 수 있다. 양심화분, 양심화단, 양심거울을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명령으로 생각지 않는 한, 양심으로부터 도망치기는 계속된다. 쓰레기 문제는 고난도의 스킬이 요구되는 문제다. 그것 하나면 꼭 양심을 지킨다는 상징체계처럼 거울을 맹신하거나, 잘 지켜지지 않는다고 백설공주의 왕비처럼 거울에 배신감 가질 필요는 없다. /최충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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