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새로 세운 64개 성씨 유래비를 찾는 종친회 전세버스들은 개체 특성을 간직하려는 기본 욕망, 어떤 의미든 성씨에 대한 집착이 죽지 않았음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롤랑 바르트가 합리적 논거 없이도 사람을 순식간에 무장해제하는 것을 ‘신화’로 봤다면 나는 ‘성씨’를 그런 힘으로 본다.
뿌리공원의 성씨 내력을 읽다 보면 성씨담은 어느새 신화가 되어 있다. 귀신 낮밥 먹는 소리랄지 모르나 족보 정리 단계가 모호했던 탓이다. 최초의 족보인 안동권씨성화보(1476년) 등 일부를 빼면 족보는 한다고 해야 우리들 고조할아버지의 고조할아버지 적으로 소급된다. 위조도 많았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바꾸는 환부역조의 시절을 겪은 다산(茶山)은 양반이 되어 군역(병역)을 면피하기 위해서라 했다.
실제 족보 만들기를 본격화한 지는 200∼300년을 넘지 않는다. 삼국시대 호구조사나 통일신라기 청주(서원경)에서 작성된 정창원장적을 호적의 원형으로 우길 수는 있다. 고려시대의 족도(族圖)라는 가계표는 양반과 천민 변별에 무게를 뒀고 권문세족에서나 쓰던 것이었다. 조선시대는 호구단자에 성명과 본관 등을 기록했다.
그러나 “청소년에게 뿌리를 일깨워준다”(중구청 관계자의 말)는 신념에 너무 얽매일 까닭은 없다. 그곳은 오리배를 타며 확인하는 배타적 가족주의 마당도, 카메라 앞에서 삽질하는 유력 인사의 공간도 아니다. 내가 나임을 득도하는 공간으로 뿌리내려야 한다.
그곳은 또한 지난주 뿌리축제에서 비빈 500인분 ‘다함께 한 뿌리 비빔밥’처럼 우리 안에 꿈틀거리는 귀천(貴賤) 의식을 깨는 실천 공간이요, 가족의 의미를 찾는 화해 공간, 아니 배설과 생식을 담당하는 항문과 음부 같은 기관이어야 한다고 본다. 이 시대의 ‘뿌리’는 진실로 나를 나답게 하는 것이고 그 원초적 끈을 붙잡는 곳이 뿌리공원이어야 하지 않을까? /최충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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