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개의 본질은 뭐냐. 반려동물인가. 식품이면 보양식인가 혐오식품인가. 먹는 사람, 안 먹는 사람의 찬반양론은 지난날도 많았는데, 조선 중종 때 권신 김안로 같은 개고기 마니아도 있었다. 그는 살진 개고기를 얻어먹고 이팽수에게 승정원 주서 보직을 줬다.
개에 이름을 붙이는 전통도 꽤 오래됐다. 심지어 당쟁 과열기엔 자기 집 개를 ‘시열’(송시열)로 작명하고 나중 잡아먹은 반대 당파 사람들이 있었다. 쇼펜하우어는 기르던 개에 같은 철학자인 ‘헤겔’ 이름을 붙여 학대했지만 먹진 않았다. 어느 것도 개고기 식용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그보다 꼬리치는 개도 좋고 식탁의 개고기도 좋아한다는 말 앞에서 두 손 두 발 들었으니까.
현행법을 봐도 모순이다. 개는 가축이며(축산법, 가축전염병예방법) 또 가축이 아니다(축산물가공법 시행령). 식품이면서 식품 아니다. 맛있으니 너도 먹으라는 것도, 아양떠는 영물이니 먹지 말자는 것도 이론 토대로는 부실하다. 소나 돼지나, 올 들어 7월까지 국내 소비된 7100만 마리의 닭이나, 상당수는 제 주인을 알아본다.
상호부조론을 쓴 크로포트킨의 논리라면 사람이 동물보다 동물적이다. 늑대끼리 서로 도와 멸종을 면했다는 그는 늑대는 늑대적이지 않다고 선언한다. 동물이 동물적이지 않다. 개의 역사도 이 길목에서 갈리는 게 아닐까. 참고로, 올림픽을 치르는 베이징에 가면 개고기 통조림, 개고기 라면이 있다(음식 관련 한자에 ‘개 견(犬)’ 자가 많이 들어 있음에 유의).
글쓴이 입장을 말할 차례다. 요사이 남 싸움을 싸워주는 싸움에 지쳐 개싸움에 말려들 여력이 없어 ‘되고송’으로 대체하겠다. ‘먹고 싶으면 먹으면 되고, 먹기 싫으면 안 먹으면 되고’다. 삼복의 고단한 터널을 지나면서 닭장 지키던 개까지 먹혔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이번 글을 마감한다. 그리고 이제부터, 난 개고기를 먹지 않기로 했다. 自是誓不食犬之肉矣(자시서불식견지육의). /최충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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