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고뉴 지역은 가장 프랑스적인 면모를 갖고 있는 곳 중의 하나이다. 와인 분야에서 보르도와 부르고뉴 지역은 쌍벽을 이룬다. 그러나 프랑스적 면모를 이야기할 때 보르도는 11세기부터 3백년간 영국의 속령으로 지낸 영향으로 인해 부르고뉴와 같은 진한 역사적 흔적이 적다. 이에 비해 부르고뉴 지역은 와인과 관련해서 매우 프랑스적인 면모를 만들어 냈고, 이러한 면은 지금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 지역은 그리스와 로마인들에 의해 포도밭이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마르세이유에서 이들의 번창했던 주거지를 확인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후 로마인들이 부르고뉴의 와인이 발전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본다. 특히 BC 52년, 줄리어스 시저가 베르생쥐토리스(Vercingetorix)가 이끄는 수많은 골 족들을 쳐부수고 이 지방을 평정하면서 지역 경제의 활성화를 위해 포도밭과 와인을 장려했다고 한다.
그 후 부르고뉴의 와인을 진정으로 발전시켰던 것은 당시의 수도원이었다. 10세기 베네딕트 교단이 이루어지고 1089년 이 베네딕트의 또 다른 한 파였던 시스터가 운영하던 시토 수도원이 만들어지고, 노동의 종교적 윤리에 입각, 당시 고된 육체노동의 한 대상으로서 포도를 가꾸고 와인을 만드는데 힘을 바쳤던 것이다. 한 예로 이 포도밭이 지금도 유명한 <끌로 드 부죠>이다. 다른 토양의 포도밭과 구별하기 위해서 담장(clos)을 둘러쳐서 오늘날까지 그 형태를 그대로 이어오고 있다.
그 후 부르고뉴 지역 와인이 융성기를 맞는 시기가 14세기 중반에서 15세기 중반까지 이어지는 부르고뉴 공작 시대이다. 그 당시 부르고뉴 공작들은 단순히 이 지방뿐만 아니라 북부 프랑스 지방의 거의 대부분, 벨기에와 룩셈부르그, 네덜란드, 스위스의 일부 지역까지 대표부를 설치하고 위력을 뻗치고 있었다.
필립 르 아르디(Philippe le Hardi) 부르고뉴 공작은 가메이(Gamay)의 포도품종을 뽑아내고 그 자리에 피노 누아르(Pinot Noir) 포도품종을 바꾸도록 명령을 내릴 정도로 미각이 훌륭했다고 한다. 깊고 미세하면서도 우아한 맛을 나게 해주는 피노 누아르가 단순하게 마실 수 있는 가메이의 과일 향 포도 맛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후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부르고뉴의 와인은 결정적인 영향을 받는다. 부유한 사람들과 수도원이 가지고 있던 포도밭들은 작게 나뉘어져 영세화되고, 나폴레옹 법전에 의해 부친이 죽으면 즉시 토지는 아들들에게 공평하게 분할되어지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55헥타르(약 165,000평) 정도인 <클로 드 부죠>는 소유주가 80여명이나 된다. 마치 체스 판을 연상시킨다. <로마네 꽁티>는 면적이 축구장보다 조금 클 뿐이다. 이런 소규모 생산자가 현재는 약 10,000 여명이나 되고, 1인당 평균 소유 면적은 약 4헥타르(약 12,000평)라고 한다. 포도밭을 소유하고 재배, 양조, 병입까지 모두 행하며, 출하까지 일관된 생산 활동을 하는 곳을 부르고뉴 지방에서는 도멘(Domaine)이라고 한다. 보르도 지방의 샤또(Chateau)와 비슷한 용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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