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까지만 읽고, 성숙한 난소가 밥알 같아 얻은 반초(飯稍) 별명답게 입안에서 터지는 탱글탱글한 주꾸미 알 맛을 떠올린다 해서 잘못은 아니다. 호박잎에 된장 찍어 생으로 먹어 또 흉 될 일 없다. 오늘의 주꾸미는 그런 주꾸미와는 차원이 다른 주꾸미다. 주꾸미 빨판에 고려청자를 달고 나와 보물 무더기를 찾게 한 대박의 주인공이다.
약간은 엽기적인 해학까지 곁들여진 이야기다. 가수 이문세도 아침 방송에서 이 주꾸미에 얽힌 사연을 객쩍게 소개하고는 죽겠다고 웃는다. 주꾸미들이 자신들의 동상 건립 소식에 좋아할 거다, 혹은 아무것도 모르리라는 생각도 인간을 창조물 맨 윗자리에 올린 인간 본위의 자만일 수 있다.
주꾸미 공덕비는 사람으로 하여금 움벨트(umwelt) 개념으로 인도하게 한다. 주변의 경험하는 세계가 움벨트이다. 주꾸미에는 주꾸미의 시간관과 공간관이 있고 절대적 현실이 있을 테고, 인간의 기준에서 공덕을 기릴 장한 일을 했으나 주꾸미의 입장에선 피곤한 다리를 의탁해 휴식을 취하다가 봉변을 당했을지 모른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즉, 인간의 머리로 사고한 것만이 만물의 실상이 아니라는 점. 주꾸미는 본의와 아랑곳없이 어민의 통발에 잡혀 올라왔다. 먹물을 함부로 뿜어내지 않는 절제의 덕을 지녔을 그 주꾸미는 위탁판매장에서 팔려 가을 주꾸미로서의 소명에 값했다니 떨떠름하다. 난해하고 능수능란한 여덟 다리를 각각 인간의 망막으로 풀어보려 했으나 아쉽게 됐다.
주꾸미 동상은 인간에게 합당하면 동물에게도 합당하다는 귀납(歸納)의 횡포를 입증하고는 있지만 예외로 두려 한다. 청자를 안고 서해바다에 둥실 솟은 우리의 복(福)주꾸미는 천상병이 무구한 것들을 향해 외치는 소리로, “요놈! 요놈! 요 이쁜 놈!” 아닌가. 청자 대접을 뒤집어쓴 주꾸미와의 만남은 필경 거룩한 인연이다. 인간, 제 눈에 안경이라도 도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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