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에 필립 로췰드 남작이 죽는다. 그는 65년 동안 무똥 로췰드를 지켜왔다. 와인을 만들 때의 포도 비율을 바꾸고, 꾸준히 품질을 향상시키면서 무똥 로췰드의 명성을 유지해 온 사람이 바로 필립이다. 필립 남작을 기리기 위해 1987년 라벨에는 포도송이를 배경으로 필립 남작의 초상화가 그려진다. 그림 아래 적힌 글도 필립 남작의 뒤를 이어 무똥 로췰드의 소유주가 된 딸 필리핀 여사가 오랜 세월에 걸쳐 와인의 품질을 발전시킨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회고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1986년까지 무똥에 적혀 있던 필립 남작의 서명은 1987년을 기점으로 필리핀 여사의 사인으로 바뀐다.
로스차일드 런던 지부를 설립한 네이선 로스차일드의 아들 나다니엘은 1850년 파리로 이주하면서 자신이 직접 생산한 와인으로 손님들을 대접하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는 1853년 프랑스 보르도 중심에 있는 샤또 브란느 무똥을 사서 샤또 무똥 로췰드라 이름을 바꾼다. 2년 후 1855년 보르도 와인의 역사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가하는 와인의 등급이 매겨진 것이다. 이때 샤또 무똥 로췰드는 2등급을 받는 뼈아픈 상처를 얻게 된다. 1922년 나다니엘의 손자인 필립 남작은 이런 모토를 내걸었다. “First I cannot be, second I will not be, Mouton I am./Premier ne puis, Second ne daigne, Mpouton suis.(나 특 등급이 되지 못함, 나 2등급에 만족 안 함, 나는 무똥이다.)”이것은 프랑스 부르따뉴 출신의 가문으로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었던 로안(Rohan) 가문이 “나는 와인 되지 못함. 나는 왕자로 만족 안 함. 나는 로안이다.”라고 한 말에서 따온 표현이다.
1922년 필립 드 로췰드 남작이 20세의 젊은 나이로 샤또 무똥 로췰드를 맡게 되면서 일대 개혁이 시작된다. 당시까지는 포도밭에서는 와인을 생산할 뿐, 와인 상인들에 의해 병입되고 유통되었다. 또한 와인 거래 역시 그들에 의해 좌지우지 되었으며, 따라서 포도밭들은 이윤을 내지 못했다. 필립 남작은 1924년부터 와인 업계에서 최초로 자신이 만든 와인을 자신이 직접 병에 담아(고급 와인의 라벨에서는 직접 ‘샤또에서 병입 하였음`을 나타내는 ‘미쟝 부떼이으 오 샤또(Mise en bouteilles au ch?teau)`라는 문구를 발견할 수 있다)소비자에게 내놓았다. 이것은 당시에는 혁신적인 시도였는데 이제 이 방식은 전 세계 와인업계에서 일반화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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