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0년대 진딧물로 멸종 위기 맞기도
보르도가 세계적인 와인 생산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지역이 자연의 혜택을 많이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사건과도 연관되어 있다. 1152년 보르도 지방 옛 이름인 아끼뗀느(Aquitaine) 공국의 공작 딸인 알리에노르(Alienor)가 장차 영국의 왕이 될 앙리 플랑타즈네(Henri Plantagenet)와 결혼하게 된다.
이 결혼은 막강한 앵글로 가스공(Anglo-Gascon) 공국의 탄생을 알리며 중대한 세력이 되었다. 그때부터 영국은 보르도 지방의 와인을 선명한 색상을 갖고 있다고 하여 ‘클라레(Claret)`라 부르고 수입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시대에는 오늘날 영국인들이 좋아하는 음료수인 차(Tea), 커피와 코코아가 유럽에 아직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와인의 인기는 매우 높았! 다. 영국인들은 보르도에서 수입되는 맑고 과일향이 풍부한 장밋빛 와인을 ‘claret`라 불렀다.
보르도 와인의 세계화를 처음 이끌었던 이 와인이었다. 레드와인과 로제와인의 중간 자리에 있으면서 로제와인의 성격과 레드와인의 탄닌과 같은 바디감을 가진 와인이다. 지금은 이 이름을 딴 보르도 끌레레(Bordeaux -clairet) AOC가 있다. 사람들은 오늘날 보르도 와인을 이제 복합적이며 중후한 무게감을 가진 진한 와인으로 기억하고 있다.
게다가, 와인 수출을 위해서는 영국 선박이 필요하였는데 지롱드 강 어귀의 보르도 항구는 이런 배들이 접근하기에 매우 유리한 곳이었다. 이 항구로부터 해상으로 와인이 운반되었고 이로 인하여 보르도 와인들은 영국의 주문에 의한 체계적인 생산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보르도 지역의 항구들이 대단한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보르도는 17세기에 들어와서 네덜란드와도 교역을 시작하였다. 네덜란드인들은 이 지역 와인의 중요한 구매자였을 뿐만 아니라 상업적, 기술적 혁신으로 구매를 촉진시켰다. 그 당시 네덜란드인들은 무역으로 많은 와인을 구매하여 오드비(Eau de vie)를 만드는데 사용하였다. 그때부터 보르도는 전통적인 클라레(Claret)뿐만 아니라 증류주에 쓰이는 드라이 화이트와인과 스위트 와인을 수출하기 시작하였다.
18세기에는 쌩 도미니크와 서인도제도의 작은 섬들이 보르도 와인 수출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 프랑스 식민지 지역을 무역 중개지로 하여 보르도 와인은 미국 시민혁명 때까지 미국 시장에서 번성하였다. 한편 그 당시에 영국은 보르도 와인을 옛날처럼 많이 수입하지 않았지만, 런던의 상류층들이 찾는 품질 좋은 와인들이 유행하기 시작하였고, 와인 병에 마개와 밀봉을 하여 유통하게 된 것이 이 시기였다.
19세기 중반에는 오이듐(Oidium)이라는 균이 포도밭들을 덮쳤으나 1857년 황 살포로 이 병균의 확산을 막을 수 있었다. 보르도 와인생산자들은 오이듐 균의 위기를 쫓아낸 동시에 1855년 지롱드 지방 내 메독, 쏘테른느의 그랑 크뤼들 그리고 그라브 지역의 샤또 오-브리옹(Chateau Haut-Brion)이 크뤼 클라쎄 등급이 매겨지는 영광도 갖게 된다. 또한 그 당시 유럽의 산업혁명과 함께 보르도 와인 산업은 크게 발전하였다.
1865년부터 보르도 지역은 최고의 와인이 생산되었고 독일, 스칸디나비아 반도, 벨기에, 네덜란드와 영국으로의 수출이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1865년부터 1869년까지 포도나무의 뿌리를 갉아 먹는 진딧물인 필록세라(Phylloxera)의 징후가 나타나기 ! 시작하다가 1882년에는 보르도 전 지방에 퍼져 모든 품종들에서 무차별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해충에 강한 미국 포도품종의 뿌리에 보르도 포도품종을 접목시키는 처방책의 발견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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