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는 누구? |
자유大韓 수호 주인공인 동시에 희생자
대전 750여명 전국회원 4000여명 달해
월 7만원 수당뿐… 정부 홀대 아쉬움 커
“내가 사는 날까지 그 날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겁니다.”
그 날에서 56년이 흘렀지만 (사)6·25참전유공자회 대전시지부 석찬필 지부장은 전쟁이 터지던 날, 당시 기억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아니 잊을 수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5시,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일제히 남침을 해 오던 그 때 석 지부장은 강원도 춘천시에 있는 6사단 7연대에서 운전병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석 지부장은 “새벽 내무반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시각, 연대 본부로부터 전쟁이 터졌다는 다급한 전갈이 날아왔다”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경황이 없었지만 연대장 명에 따라 곧바로 전투태세에 임했다”고 긴박했던 상황을 전했다.
그가 참가한 첫 전투는 부대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현암리라는 곳에서 벌어진 전투. 당시 북한군은 소련으로부터 지원 받은 전차를 몰고 순식간에 국군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전차에 맞설 국군의 유일한 무기는 ‘M3’라고 불렸던 60㎜포로 이 마저도 보급량이 얼마 되지 않아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석 지부장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은 형국으로 북한군에 비해 병력과 무기가 열세였던 국군은 후퇴에 후퇴를 거듭해야만 했다”고 말했다.
그가 소속돼 있던 부대는 현암리 전투에서 밀린 뒤 강원도 홍천, 원주를 거쳐 치악산을 넘어 경북 영천 방면으로 퇴각했다.
석 지부장은 영천전투를 설명하기 앞서 쉽게 말을 잇지 못하고 한 숨부터 내쉬었다. 한 참만에 입을 뗀 석 지부장은 “영천에서는 양쪽이 모두 미쳤었다”고 말했다. 배수진을 치고 대구, 부산을 지키려는 국군과 남하하려는 북한군 사이에 7월 말에서 9월 중순까지 벌어졌던 혈전을 두고 한 말이다.
“똑같은 고지에서 낮에는 국군, 밤에는 북한군으로 주인이 바뀌기를 수십 차례 거듭했다”며 “이 때 비빔밥이라는 말이 생겨났는 데 이는 국군과 북한군이 서로 뒤엉킨 채 백병전을 수 시간 계속될 때를 두고 한 말이다”고 회상했다.
이후 신 지부장은 압록강을 눈앞에 둔 평안북도 초산까지 북진했다가 중공군 개입으로 다시 후퇴 강원도 금성지구 전투에 임하던 중 부상을 입고 전역했다. 그는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참전용사들이 홀대를 받고 있다며 정부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신 지부장은 “6·25참전 유공자회에 속한 회원들은 전쟁에서 자유대한을 수호했던 장본인들이며 동시에 희생자이기도 하다”며 “그렇지만 정부는 월 7만원의 수당만 지급할 뿐 아직까지도 우리들을 국가유공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또 전후세대들에 대한 충고도 잊지 않았다.
그는 “전후세대들이 북한을 한 핏줄로 생각하는 것은 좋지만 안보의식이 너무 결여돼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안보의식 해이로 만약에 전쟁이 일어날 경우 나와 내 가족이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6·25 전쟁 56주년을 맞는 소회는.
▲한 마디로 감회가 새롭다. 그렇지만 56년 전 일어났던 전쟁의 비극은 지금 상상만 해도 몸서리나고 치가 떨린다. 전쟁을 경험한 세대들은 애국지심으로 우리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의식이 투철했다. 더욱이 전쟁에 직접 참여한 참전용사들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그렇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안보를 등한시하고 있으니 참으로 걱정이다. 젊은이들이 광장에 모여 축구응원을 할 때 보여주는 열정의 반만이라도 안보태세를 확립하는 데 썼으면 좋겠다.다시는 이 땅에 6·25와 같은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투철한 국가관을 확립하고 안보의식을 다져 국가발전에 기여해야 한다.
-6·25참전 유공자회는 어떤 단체이며 어떤 활동을 하나.
▲본회는 사단법인체로서 참전용사들의 친목을 다지고 명예회복을 위한 단체이다. 전국적으로 4000여명이 등록돼 있으며 대전에는 대전시지부 아래 각 구별로 5개 지회가 있으며 약 750여명의 회원이 등록돼 있다. 분기별로 안보대회를 개최하는 등 국민들의 안보의식 고취에 신경을 쓰고 있으며 참전용사들이 국가 유공자로 지정될 수 있도록 하는 데 전력하고 있다.
-6·25참전유공자회원들이 국가유공자로 인정되지 않고 있는 데 이에 대한 견해는.
▲한마디로 정부에 대해 섭섭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6·25당시 전상자를 후송 생명을 보존할 수 있도록 사명을 다한 사람이 바로 우리 6·25참전 생존자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전상자에 대해서는 국가유공자로 지정해 주고 우리들 생존자는 국가유공자로 인정하지 않고 차일피일 시일을 연장하고 있어 아쉬운 마음이다.
벌써 나이가 여든을 바라보며 남은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6·25 참전 노병들의 소원인 국가유공자 지정이 하루 빨리 이뤄지기를 소망한다.
-해방이후 월남한 이유와 대전에 정착한 특별한 계기가 있다면.
▲해방된 해 18세였다. 당시 김일성이 북한에 공산주의 체제를 확립했는 데 그 정권은 단독 독재정권 이었기 때문에 월남키로 결심했다. 지금도 대한민국을 선택한 것에 후회가 없다.
대전에 정착한 것은 전쟁이 끝나고 군에서 제대한 뒤 육군의 도움을 받아 전쟁 통에 헤어져 지냈던 충북 보은에 있는 부친을 찾을 수 있었다. 보은에서 몇 년을 생활하다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자연스레 보은보다 더 큰 대전으로 오게됐다.
-군에 입대하게 된 특별한 사연이 있다는 데.
▲월남이후 서울에서 변변한 직업없이 지내다가 어깨너머로 자동차 정비를 배웠다. 그러던 중 고장난 군대차량이 도로변에 있었는 데 군인들이 정비를 하지 못해 쩔쩔매고 있었다.
그 차량을 내가 나서 정비를 해주었는 데 당시 책임자였던 장교가 “군대에 갈 나이가 된 것같은 데 먹고 살길이 막막하면 군에 입대하자”고 말했으며 고민 끝에 입대하기로 결정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나에게 제안을 해 온 장교는 내가 배속된 부대의 연대장이었다.
-전후 세대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6·25의 참상을 체험하지 않아 그 당시 비참함을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전설로 들어 조금은 알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현재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고 내 조국, 내 강토를 수호하겠다는 굳은 결의를 가지고 국가관 확립에 기여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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