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립운동가 조완구선생 딸 조규은 여사(사진 왼쪽)가 지인과 함께 독립운동가들의 사진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민희 기자 |
76년부터 자료모아 93년 책 발간 “부친의 행적 제대로 평가 됐으면”
“6·25때 납북돼 북한 땅에 묻혀 있는 아버지의 유해를 하루빨리 고향인 남한땅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그래서 현재 충북 괴산에 모셔져 있는 어머니 유해를 부친곁에 합장해 드리는 것이 제 남은 소원입니다.”
자신도 노년의 몸이 된 조규은 여사는 하나남은 핏줄로서 아버지 조완구선생의 유해송환 작업이 이뤄지길 간절히 바랐다.
“중국땅에 묻혀 계셨던 박은식 선생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조국에 안장된 것을 지켜보니 비록 사상과 이념이 다른 땅이라도 한민족임에는 틀림없는 데 부친이 납북된 상태에서 작고하신 뒤 아무런 연고도 친척도 없는 북녘땅에 누워 계셔야 하는 지 이해할 수 없네요.”
조여사는 그러면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자신이 5살 때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를 거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등지로 떠난 부친에 대해 “생각하면 아버지는 처음부터 뚜렷한 신념과 각오아래 끝까지 진정한 독립투사이셨던 것 같다.
자신의 이해실리를 찾아 이합집산하는 부류와는 거리가 먼 분이다. 한번 뜻을 같이 하는 동지와는 어떠한 어려운 고비에도 변함없이 강인하게 초지일관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밝혔다.
그녀는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 등지로 떠난 3년 뒤 어머니께서 할머니와 자신을 포함한 3남매를 데리고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만주 용정을 찾아갔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때는 자신의 나이가 어려 기억이 잘 안난다고 밝혔다. 그래도 어머니께는 그것이 부부의 마지막 만남이 됐다고 한다.
그녀는 그후 광복될 때까지 수십년간을 가난과 갖은 어려움속에서 생활하다 33살 해방되던 해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해 서울 한미호텔에서 묵고 있을 때 아버지를 찾아가 해후했단다.
“벽초 홍명희선생이 외종사촌오빠인 데 그분이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후 묵고 있던 한미호텔에서 아버지를 찾아간 나에게 ‘얘가 규은이입니다'라고 저를 소개했죠.
어린애의 모습에서 성년으로 변한 저와 뒤늦은 상봉이었던 거죠.” 그러나 그때는 자식과 시모를 위해 생계를 책임져야 해 갖은 고생을 다하셨던 어머니는 해방을 목전에 둔 45년 2월에 이미 세상을 떠 아버지를 뵙지 못했단다. 그것이 지금도 부모에게는 서로 한으로 남았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부친이 6.25전쟁으로 납북될 때까지 한 5년간 홀로된 사촌언니와 함께 서울 제동에서 모시고 살았어요. 아버지께서는 매일 한독당과 임시정부가 있었던 경교장에 가 나라걱정을 하며 활동하셨죠.
그렇지만 그 기간 저는 처음으로 집에서 가까이 아버지를 접하면서 굉장히 자애로운 분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어떻게 저런분이 수십년을 만주와 러시아, 중국 등지에서 혼자 살아 오셨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 였으니까요.”
그런 아버지도 6.25가 터지면서 그해 9월18일 인민군에게 납북되면서 부녀간 만남은 막을 내렸다.
조여사는 아버지인 조완구선생이 광복운동에 매진하게 된 동기를 나름대로 설명했다.
그녀는 “부친은 을사조약 체결당시 내부주사의 관직에 있었는 데 가까이서 모신 충정공 민영환 시종무관이 을사조약 반대 상소를 올린 뒤 순국하신 데 대해 큰 충격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난 뒤 나라찾기에 나섰다고 얘기해 주신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부친께서는 부재 이상설, 예관 신규식, 석오 이동녕, 백범 김구, 남파 박찬익 등과는 변함없는 동지로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을 위해 운명을 같이 하셨죠. 아버지는 그후 임시정부 활동을 통해 많은 애국지사의 뒷바라지에 나선 것으로 압니다.
백범이 서거했을 때는 국민장으로 치러진 장례준비위원장을 부친께서 맡았을 만큼 두분간의 관계는 뗄라야 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노쇠한 몸으로 경교장에서 동대문운동장까지 걸어가면서 나도 같이 죽으련다고 했다고 동석하신 분이 훗날 전해주셨습니다.”
그녀는 그러나 독립운동가 길을 걸은 아버지 때문에 질곡의 세월을 살아야만 했던 가족 애환사에 대해선 어렵게 말을 꺼냈다.
“아버지는 나라와 독립을 선택한 대신 가정은 버리신 분이셨어요. 이 때문에 여느 독립운동가 가족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어머니와 오빠, 언니, 저 등 남아있는 4가족의 인생 항로는 험난하기만 했지요.”
조여사는 어머니의 한은 설명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가까이 계시는 만주 용정으로 가기로 결정하시고 할머니와 우리자매들을 데리고 만주로 가셨지요. 거기에서 조그만 구멍가게를 운영하다가 두어달 장사를 하는 동안 그 춥던 날씨도 풀리고 투도구에서 용정으로 올 때 아버지의 동지되는 분에게 꾸어온 돈 2원을 갚기 위해 당시 17세였던 오빠에게 3일간 말미를 줘 심부름을 시켰지요.
오빠는 그때 국내에서 떠나올 때 사촌형으로부터 선물받은 가죽가방이 있어 어린마음에 그 가방속에 동전 몇닢 넣어 가지고 길을 떠났던 모양입니다. 길을 떠난 오빠가 10일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아 수소문 해 보니 가는 길에 도적을 만나 비명횡사 하셨다는 겁니다.
알아보러 가신 아저씨는 시신은 화장했다고 하셨지만 어머니를 안심시키려는 말 같았어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한 어머니는 당시 아들 잃은 마음에 식음을 전폐하시다시피 했지요.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야속하고 원통하고 기구한 우리 어머니의 운명을 어디에다 호소하고 누구를 원망해야 한이 풀릴지 안타까울 따름 입니다.”
그녀와 가족의 인생사 질곡은 듣는이의 마음도 무겁게 했다. “언니는 삯바느질로 집안의 생계를 맡고 있는 어머니 일을 도와드리는 데 많이 희생했지만 어머니께서는 나만큼은 교육을 시켜야한다는 일념에 내나이 14살 때 다시 서울로 돌아와 고교와 사범학교에 진학하게 됐지요. 해방도 못보고 돌아가셔서 아버지도 뵙지못했한 그 한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고단했던 가정사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기 꺼려하는 그녀에게 지난 93년 출간한 ‘고독한 승리’책자 출간배경을 물었다.
부친의 독립운동사와 관련된 각종 자료에 나타난 내용을 취합해 놓고 자신이 들은 것을 써놓은 이 책에 대해 그녀는 “내 생전에 이를 이뤄놓아야 하겠다고 마음에 다짐하며 진솔하고 뚜렷한 기억을 남겨야 후세 사가들의 바른평가를 받을 것 아닌가 하면서 아쉬운대로 조각보 모으듯 썼다”고 말했다.
이 책 출간을 위해 76년부터 자료를 모으기 시작해 자신이 써놓은 것을 딸이 정리해줬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또한 부친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길 소원했다.
“독립운동은 어떤 한사람의 힘만이 아닌 많은 사람의 피와 땀으로 이뤄졌다고 봅니다. 제가 볼 때 부친은 철저한 민족주의자로서 해방후에도 남북의 분단 위기상황을 막기 위해 끝까지 노력한 것으로 보여요. 우리 역사에서 부친의 행적이 있었던 대로 제대로 평가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끝을 맺었다.
조완구 선생은 누구
1880년 서울출생. 호는 우천(藕泉). 일찍이 대종교에 입교해 선교활동에 힘썼으며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대한협회를 조직, 국권회복에 전념했다.
1910년 국권피탈 후 만주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벌였다. 3.1운동 직후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에 참여, 의정원의원·내무차장·노동국총판·재무부장·내무부장 등을 지냈다.
32년 윤봉길의사의 4.29의거를 도왔고 40년 김구(金九) 등과 함께 한국광복군을 결성했다.
45년 11월 임시정부 요인들과 같이 귀국해 건국 기틀의 마련을 위해 힘쓰다가 6.25때 납북되어 평양에서 병사했다. 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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