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라오콘 상(像)이 있다. 똑같이 바다뱀의 공격을 받고 그리스의 것은 '신음'을 내는데 로마의 것은 '고함'을 지른다. 고통 속에서 차분함을 유지할 줄 아는 사람들과 모르는 사람들의 인식 차이로 이해한다.
"모든 이들의 가슴에 인간의 존엄성을 일깨워준 그대들의 죽음을 애도하고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하겠다." 미군들이 성금 2만2천달러를 모아 세운 장갑차 희생자 신효순·심미선양 추모비에는 미군 장병 일동 명의로 이렇게 적혀 있다. 뒷면에는 두 여학생이 졸업한 효촌초등학교의 교장이 쓴 '아! 봉숭아가 졌구나'란 추모시가 영·한 대역으로 새겨졌다.
하지만 두 미군 '무죄 평결' 이후 항의 시위는 더 격렬해졌다. 급기야 미국 대통령의 '슬픔과 유감'을 담은 사과 메시지가 주한 미국대사와 주한 미군사령관의 입을 통해 전달됐다. 그래도 별무신통이고 관련 미군들이 출국한 것이 알려지자 규탄 집회가 끊일 줄 몰랐고 또 오늘도 예정돼 있다.
사실, 외교적 언사는 단어 하나하나에 천금의 무게가 실린다. 때로는 말보다 무언의 몸짓이 효과적일 수 있다. 중국 주석이 일본 방문시 천황인지 왕인지가 주최하는 만찬에 인민복을 입고 나온 적이 있다. 과거를 반성하라는 완곡하면서도 강경한 보디 랭귀지였다. 그런 뚝심이나 배짱이 우리에겐 없다.
미군 정찰기와 중국군 전투기의 충돌 사건에서도 칼자루를 쥔 중국이 만만디 전략으로 실속을 챙길수록 미국은 애간장이 탔었다. 사과(apology) 대신 유감(regret)으로 어물쩍 떼운 미국이 조종사의 죽음에 대해 결국 미안하다(sorry)고 표현했다. 힘의 우위를 앞세운 미국이 줄줄 새는 소리로도 들렸다.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어제 우리가 대서특필한 미국 대통령의 사과 소식을 미국내 주요 언론들은 한 줄도 다루지도 않았다.
사랑은 불어로, 우정은 이태리어로, 기도는 스페인어로, 싸움은 독일어로 하는 게 효율적이다. 이래서 장사엔 영어가 좋다고 하는가 보다. '사과'에도 그렇다. 두 미군에 대한 재판이 끝나던 날 "형사적 과실을 물을 수 없는 불행한 사고" 운운한 주한 미8군사령관의 말을 곱씹으면 괘씸하다.
엉뚱하게도 "사랑은 '미안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라는 러브 스토리의 대사가 떠오른다. 어떻게 해야 두 피다 만 봉숭아꽃의 넋을 위로할 수 있을까? 인식의 차이인가, 미국과 우리는. 라오콘상의 신음과 고통의 차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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