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난순의 필톡
2019-12-25
한기가 코끝을 스쳤다. 동지를 이틀 앞둔 겨울 바람이 매서웠다. 앙상한 나무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홍시가 애처로웠다. 손바닥만한 햇살에 의지해 마루에 앉았다. 적막감이 감도는 마당 그늘의 잔설이 눈에 들어왔다. 오랜 풍상에 반질한 마루 끝을 손으로 문질러보며 그녀의 그..
2019-12-11
"한쪽 성이 지배하는 환경은 좋지 않다. 하나의 방 안에 너무 많은 테스토스테론이 존재해선 안 된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전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의 말이다. 11월 20일자 한겨레신문 박정림 KB증권 사장의 인터뷰 기사를 흥미롭게 읽었다. 박정림 사장은 '여성'..
2019-12-04
약육강식(弱肉强食). '약자의 살은 강자의 먹이가 된다'. 덤불 속에서 납작하게 몸을 낮춘 사자의 눈이 이글이글 타오른다. 먹잇감을 노려보다 드디어 행동 개시! 사자는 재빠르게 몸을 일으켜 목표물을 향해 돌진해 얼룩말의 목에 송곳니를 박고 숨통을 끊는다. 자, 이제 성..
2019-11-20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은 나를 사로잡는다. 프로이트를 추종한 달리의 그림 역시 꿈과 망상, 욕망으로 버무려져 기이함을 준다. 달리의 모든 작품에 나타나는 어떤 강박적인 집착은 스페인 카달루냐 사람들의 오직 먹고, 마시고, 듣고, 냄새 맡을 수 있거나 볼..
2019-11-13
사라 코너의 귀환. 돌아온 린다 해밀턴. '터미네이터' 1편의 무시무시한 강열함이 아직도 선명한데 벌써 25년의 세월이 흘렀다. 1, 2편에서 어두운 미래에 맞선 사라 코너가 겪는 공포감을 잊지 못한다. 그런데 나이 60이 훌쩍 넘은 린다 해밀턴이 여전사가 돼 스크린을..
2019-10-30
내가 사는 용두동엔 유난히 내 눈길을 끄는 집이 있다. 2005년 이 동네로 이사온 후 출퇴근길에 매일 본다. 이곳 용두동엔 아주 오래된 5층짜리 연립주택 단지가 있었는데 2000년대 초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엔 새 아파트가 들어서 삐까번쩍한 동..
2019-10-23
조국과 설리. 이 두 사람을 놓고 단박에 떠오르는 건 무엇일까. '조국정국'이라는 핫 이슈에서 '기레기'라는 경멸적 용어는 기자들에게 자괴감을 안겼다. 연예인 설리, 그는 왜 죽음을 택했을까. 바야흐로 국민들은 언론개혁을 부르짖는다. 언론의 정파성, 원칙과 공공성을 망..
2019-10-09
『충청도의 힘』은 나의 애장품이다. 한 번 읽고 책꽂이에 꽂히고 마는 책이 아니란 말씀이다. 좀 과장하면 성서와 맞먹는 존재라고나 할까. 울적할 때 읽으면 바로 깔깔거리게 만드니 이런 명저가 어딨겠냐 말이다. 처음 읽을 땐 배꼽이 십리 밖으로 달아나 찾는데 한참 걸렸다..
2019-10-02
내가 다닌 대학은 기독교재단의 학교로 '기독교 입문'이라는 필수 교양과목이 있었다. 대학 교회 예배에 참석하는 채플도 의무였다. 당연히 기독교신자가 아닌 학생들은 따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쉽고 후회되는 게 있다. 그때 송기득 신학과 교수의 존재를 알았더라면 청강이라..
2019-09-18
1990년대 보스니아 내전의 '발칸의 도살자' 라도반 카라지치는 원래는 정신과 의사였다. 거기다 시인으로도 활동한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그런 그가 정치인으로 변신해 내전 당시 잔혹한 학살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인종 청소'라는 명분으로 7천여명의 무슬림을 학살하도록..
2019-09-04
지난달 29일 오전 대전지법 천안지원에 갔다. 법원 앞 넓은 광장엔 있어야 할 사람들이 안보였다. 그들은 도로 바로 길 가, 그늘도 없는 뙤약볕 아래서 나를 맞았다. 차들이 쉴새없이 지나가고 경적소리도 시끄러워 대화하기가 곤란했다. 유성기업 노조는 유시영 전 대표의 처..
2019-08-21
지난 주 금요일 아침 보문산에 갔습니다. 제가 늘 찾는 곳입니다. 막 산에 오르는데 이슬비가 내렸습니다. 우산을 받쳤지만 맘 같아선 비를 맞고 싶었습니다. 어찌나 예쁘게 내리던지요. 촉촉해진 땅과 물을 머금은 나무들이 생명의 기를 내뿜었습니다. 새들의 지저귐과 진초록의..
2019-08-14
여성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그리고 전쟁은 무엇인가. 모든 문화는 전쟁을 남성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나라를 위해, 동포를 위해, 자신의 신념을 위해 싸우는 용감하고 강한 전사는 이상적인 남성상이었다. 전쟁에 관한 담론은 오로지 남성만을 위해 존재했다. 전쟁이라는 것은 남..
2019-07-31
나이 마흔을 갓 넘긴 사내가 2층 발코니에서 비장한 표정으로 군중을 바라봤다. 옆에는 자신의 사병조직인 '방패회' 회원 4명이 자위대 총감을 인질로 삼고 사내를 호위하고 있다. 일장기가 그려진 머리띠를 두른 사내는 운동장에 모인 자위대원들을 향해 일장 연설을 했다. 전..
2019-07-24
이제는 고인인 된 정두언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그는 한때 'MB의 최측근', '왕의 남자'로 불렸다. 이명박 정권의 개국공신이었던 정두언은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권력의 정점을 누렸다. 그러나 권력의 달콤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정두언은 이명박 대통령의 충직한 참모가..
2019-07-10
"이보시라요. 전화기 좀 빌려줄 수 있습네까? 서울 이모한테 전화 좀 하려고 하는데 말입네다.", "당신들 누구요? 어디서 왔습니까?", "북에서 왔습네다." 6월 15일 아침 삼척항에서의 대화를 짐작해 봤다. 기시감이 든다. 영화 '공동경비구역'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2019-07-03
지금은 명칭이 집배원이지만 예전엔 우체부라 불렸다. 부르릉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면 개가 컹 짖는다. 그리고 어김없이 우체부가 신문을 들고 마당에 들어선다. 지금은 어떤 지 모르겠지만 시골은 예전엔 신문도 우체부가 배달했다. 하루 늦은 '구문'이지만 우체부는 대학 휴학하..
2019-06-19
7년 전이다. 봄에 동 주민센터에서 텃밭을 일구자는 취지에서 신청한 주민들에게 상자와 거름, 채소 씨앗을 나눠줬다. 난 상추와 방울토마토를 선택했다. 주말 하루 반나절을 상자에 거름을 붓고 씨앗을 심고 물을 줬다. 목감기로 침을 삼키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베란다에서 내..
2019-06-12
6월이 되면 천지 사방에 퍼지는 냄새가 있다. 밤꽃 냄새다. 산들바람이 부는 초여름의 밤, 창문을 열면 어김없이 밤꽃 향이 멀리 있는 산에서 도심지까지 풍긴다. 특유의 밤꽃 냄새가 나면 나도 모르게 코를 벌름거리며 '이제 여름이 시작되는구나'라는 걸 실감한다. 자연이..
2019-05-29
어릴 적 꿈이 원양어선 타는 거였다. 지금 생각하면 엉뚱하지만 그땐 상상의 나래를 펴며 즐거움에 빠지곤 했다. 집 앞 야산엔 커다란 묘가 많았다. 잔디밭도 넓어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자치기, 삘기 뽑기, 겨울엔 비료포대 깔고 앉아 눈썰매도 타는 등 밥만 먹으면 거기서..
2019-05-22
10년 전 이날이었습니다. 2009년 5월 23일. 파란 하늘과 달콤한 아카시아꽃 향기가 코끝을 간질이는 5월이었습니다. 눈부신 햇살은 바람에 나부끼는 신록을 더욱 빛나게 했지요. 그런 찬란한 봄에 당신은 우리 곁을 홀연히 떠났습니다. 마침 그날은 대전충남기자협회 체육..
2019-05-08
지난 주 TV에서 한 광고를 보고 가슴이 먹먹했다. 국제아동구호기구에서 내보낸 건데 시리아인지 팔레스타인인지 폭격당한 마을이 배경으로 나왔다. 그런데 간신히 살아남은 한 아이가 충격으로 실어증에 걸렸다. 그 아이의 공포에 질린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아이는..
2019-05-01
어릴 적 내가 사는 마을 옆 동네엔 '이상한' 아저씨가 살았다. 그의 이름은 '안가 미친 이'. 성이 안씨여서 어른들은 그 아저씨를 그렇게 불렀다. 아이들도 당연히 '안가 미친 이'로 부르곤 했다. 그 아저씨가 지나가면 아이들은 슬금슬금 피하며 뒤에서 "야, 안가 미친..
2019-04-17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는 마약 사용을 권장했다. 마약이 주는 느긋함이 건강하고 자기 치유의 기능이 있기 때문에 한두 번 '소박한 도취'에 빠질 것을 권했다. 히브리 성경의 예언자 아모스와 그의 아들 이사야는 종종 아편을 포도주에 섞어 마시면서 도취감을 느끼는 것에..
2019-04-10
"저희 미술디자인학부는 하루아침에 미술디자인학부의 명칭을 아트앤웹툰과로 변경한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이런 문제들이 왜 학생들 모르게 진행이 되어가고 있는지 왜 몰라야만 하는지 의문이 듭니다. 아트앤웹툰과로 명칭이 바뀌면서 시각디자인과를 없애고 산업디자인과로 변경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