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세운동을 기념하는 인동장터 만세시위지. <사진제공=대전문화유산 울림> |
대전문화유산 울림 “시민 찾을수 있도록 재평가해야”
8월 15일 광복절은 길고 긴 일제시대를 지나 마침내 독립을 갈망하던 운동가들의 결실이 맺어진 날이다.
하지만, 당시를 떠올리게 하는 역사적 의미가 큰 현충시설이 여전히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어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대전 동구 인동시장에서 일어났던 ‘만세운동 터’는 역사적 의미보다 낮게 평가돼 철조 조형물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가하면, 광복을 기념하는 ‘을유해방기념비’는 대전역 주변 원도심 중심부에서 보문산 인근으로 옮겨져 사실상 방치된 상태다.
14일 국가보훈처 현충시설 통합정보에 따르면 대전에는 유성가도 전투지, 인동장터 만세시위지, 김용원 생가, 신채호선생 생가, 송병선선생 순국지 등 모두 19곳의 독립운동 사적지가 존재한다.
충남과 충북에도 유관순열사 생가, 한용운선생 생가, 기미독립만세 추념비 등 모두 266곳(충남 115ㆍ충북 151)이 지정돼 있다.
해방과 독립, 광복을 의미하는 날, 대한민국을 위해 투쟁한 순국선열을 추념하는 이곳은 시민들이 많이 찾곤 한다.
지역에는 문충사나 신채호 선생 생가지 등은 방문하는 시민들이 사적지를 둘러보며 제대로 역사를 알 수 있도록 조성해 둔 공간이 있다.
반면, 역사전 의미가 큰 장소이거나 시설인데도 불구하고 저평가된 현충시설이 수두룩 하다.
대전문화유산 울림에서는 을유해방기념비, 인동장터 만세시위지를 예로 들었다.
을유해방기념비는 대한민국의 해방을 기념하기 위해 대전시민들의 손으로 대전역 광장에 세웠으나, 1950년대 말∼1970년대 초 대전역사 신축공사 및 광장 조성 등으로 가치성이 잊혀진 채 보문산으로 옮겨졌다.
해방비의 경우 전국 여러 지역에 세워졌지만 대부분 규모가 작고, 특히 대전처럼 해태상과 함께 건립한 예는 찾아볼 수 없다.
이 기념비는 이러한 이유로 더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된다.
현재 ‘해방기념비’는 인적이 드문 보문산 기슭에 옮겨져 수십년째 방치되고 있으며, 해태상은 서울현충원으로 이전됐다.
이와 함께 대전 인동 장터 역시 제대로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당시 지역의 대표적인 시장이었던 인동장터는 전통적인 산물을 주로 거래하던 지역이었다.
1919년 3월 3일 인동나무장터에서 나무꾼들이 만세를 외치며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2주 후인 16일에 독립운동가들 주도 하에 만세시위가 전개돼 원동 일대까지 확산됐다.
이 운동은 대전 지역에서 400여 명의 군중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태극기를 흔드는 등 시위를 전개하는 발단이 됐다고 평가된다.
그럼에도 자세한 설명도 없이 낡은 철조 조형물만 배치되어 있는 실정이다.
안여종 대전문화유산 울림 대표는 “을유해방기념비는 전국의 기념비 중에서도 격이 높다. 한글로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고, 가장 크기도 하다”며 “원도심에 근현대를 상징할만한 조형물이 거의 없다. 더욱 을유해방기념비를 원래 있던 자리인 대전역으로 옮겨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현충시설을 복구하고 제대로 관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순국선열의 발자취를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한 방안도 함께 고민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창민 기자 kcm2625@
▲ 일제시대 만세운동이 일었던 옛 인동장터 모습. <사진제공=대전문화유산 울림> |
▲ 보문산으로 옮겨진 유해방기념비. <사진제공=대전문화유산 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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