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복궁 돌담길, 포토라인에서 바라본 청와대, 박노수미술관, 대림미술관(시계방향으로) |
원래 목적지는 그곳이 아니었다. 다른 여행길의 한 나절, 서울을 짧게 맛보는 코스로 선택한 곳이 청와대 앞길과 서촌이다.
50년만에 청와대 앞길을 24시간 전면 개방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조만간 꼭 가봐야겠네”했지만 그 길의 입구까지 딱 한달이 걸렸다. 서울 사람들은 한번쯤 걸었을 경복궁 돌담길도 솔직히 첫 경험이다.
길의 끝, 건물의 어깨, 전깃줄 사이에서 한바탕 폭우가 지나간 후의 맑고 청량한 하늘이 반갑다고 인사한다.
▲ 걷기에 좋은 경복궁 돌담길. 하늘이 맑다 |
#경복궁돌담길#청와대가는길#숙박못해보안여관#광장과집회사이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5번 출구에서 올라와 조금만 걷다보면 경복궁 왼쪽 돌담길이 이어진다. 밟히는 돌의 느낌도 좋고 곱게 내려앉은 기와들도 지루하지 않다.
청와대 방향으로 걷다보면 특별한 날이 아니고는 열리지 않는다는 영추문(迎秋門)이 있고 찻길 건너편에 앙상한 목조 뼈대와 누런 흙벽의 ‘보안여관’이 보인다.
▲ 보안여관. 숙박은 못한다. |
1936년 ‘시인부락(詩人部落)’ 창간호를 발행한 시인 서정주의 판권에 적힌 주소는 서울 통의동 보안여관이었다. 당시 서정주는 이 여관에 머물며 시를 쓰고 있었다고 한다.
2007년부터는 이른바 '문화 숙박업'으로 재개업 했다. 객실에는 투숙객이 아닌 예술가들의 작품이 들어서면서 복합예술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보안여관 옆 ‘메밀꽃 필 무렵’이란 식당도 꽤 유명한 곳이라고.
▲ 청와대 사랑채 분수대. 하늘이 참 맑구나 |
다시 찻길건너 북쪽으로 100여m만 올라가면 청와대 사랑채와 분수대가 나온다. 이른 시간인데도 광장 곳곳에 1인시위를 하는 사람들이 꽤 보인다. 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부르짖는 소리없는 외침이다.
▲ 작지만 또렷한 이것은 무지개! 낭만 산책이 시작된다. |
#청와대앞길무지개#역시인증샷#나도기잔데#춘추관서유턴
효자동 3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청와대 앞길로 들어서니 작은 무지개가 펼쳐졌다. 새벽녘 비가 내렸었나 보다.
강렬한 햇볕과 울창한 나무들 사이에 펼쳐진 산책길은 낭만의 끝을 선사했다.
▲ 청와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라고 친절하게 포토존이 마련돼 있다. |
경복궁 북쪽 신무문(神武門) 앞에 마련된 포토존은 청와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푸른 물감을 풀어놓은 듯 하늘과 닮은 색을 한 청기와가 북악산 아래 선명히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탐내고 아무나(?) 차지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영원한 주인이 될 수는 없는 그곳 청와대.
함께 길을 걸어온 중국인 여행객들이 너도나도 인증샷을 남기려 분주해 지고 우리는 좀 더 걸어 프레스센터로 사용하고 있는 춘추관까지 가기로 한다.
입구에 세워진 언론사 차량들을 기자가 아닌 관광객으로 바라보니 기분이 좀 묘했다.
▲ 서촌의 아기자기한 골목길 |
#세종마을이어딘가요?#통인시장엽전#기름떡복이원조는
효자동3거리 분수대에서 경복궁 돌담길쪽이 아닌 건너편 주택가로 들어가면 최근 청와대 앞길 공개와 함께 핫 플레이스가 된 서촌을 만날 수 있다.
세종마을은 '서촌'의 다른 이름이다. 2000년대 이후 '서촌'이라는 이름이 널리 사용되자 종로구청에서 이에 반대해 새로 만들어낸 이름이라고.
우리가 잘 알고있는 세종대왕이 서촌의 준수방(통인동)에서 태어났고, 역시 서촌의 장의동(현재의 효자동, 궁정동)에서 살았다는 기록에 근거했지만 종로구청의 문서나 행사 이외에는 잘 사용되지 않는 관제 이름이다.
▲ 통인시장 입구 |
세종마을의 번화가 한 가운데에 통인시장이 있다. 조선시대 엽전같은 것을 이용해 저렴하게 먹는 도시락카페는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랜드마크중 한 곳이기도 하고 꼭 맛보려 계획했던 기름 떡볶이는 서로 원조라 써 붙인 가게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패스하기로 했다.
▲ 서촌의 길목에서 바라본 하늘이 청량하다. |
#서촌골목길#오래된서점#윤동주하숙집우산#이상의집커피
소박하지만 가볍지 않고, 오래됐지만 낡지 않은 층 낮은 건물들 위로 언뜻언뜻 보이는 하늘이 너무 예뻐서 발길을 멈추어 섰다.
▲ 그 유명한 대오서점과 영화루 |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 대오서점, 영화와 드라마에 자주 등장한 중국집 영화루, 커피향 솔솔나는 시를 읽을 수 있는 이상의 집, 별 헤는 밤이 지어졌을 시기 머물렀다는 윤동주 하숙집 터는 과거로의 타임슬립을 하기에 충분하고 박물관이나 미술관 근처에 새롭게 지어진 카페들은 오래전부터 함께했던 것처럼 과거와 현재의 어깨를 맞대고 있다.
▲ 윤동주 하숙집 터에는 우산을 걸어놓았다. 원래는 5개였는데 폭우에 한개가 사라졌다고. |
서촌의 골목을 빛내주는 건 역시 아기자기 한 간판들이다. 때론 뜬금없거나 알 수 없는 이름들로 채워진 간판들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조심해야 할 것은 가끔 지나다니는 마을버스 뿐이다. 길을 따라 걷다보면 다시 처음 섰던 그곳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하므로 무언가를 스쳐 지났다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
▲ 플라워카페와 미술관옆 작업실 |
대다수의 카페들과 박물관은 10~11시쯤이 되어서야 문을 열고, 월요일은 문을 닫는 곳이 꽤 많으니 미리 확인후 방문하길 권유한다. (1996년 대전에서 한림갤러리로 설립했다가 2002년 서울 종로로 이전한 대림미술관에서 열리는 토드 셀비 전시회 'The Selby House:#즐거운 나의 집'은 꼭 가보고 싶었지만 너무 이른시간에 들러 입구에서 돌아서야 했다.)
산책처럼 무심하게 걷는 여행지로 더할나위 없이 좋은 청와대 앞길과 서촌 골목여행, 시간이 조금 더 있다면 경복궁을 둘러보거나 수성동 계곡쪽으로 올라가 더위를 식히는 것도 좋은 피서법이 될 것 같다.
●이곳, 꼭 들러보세요
▲ 도심속 정원이 아름다운 박노수미술관 전경 |
서촌 골목을 따라 수성동 계곡쪽으로 올라가다보면 푸른 정원이 잘 가꿔진 작지만 아름다운 미술관이 있다. 80년된 고택에 마련된 박노수미술관.
원래는 친일파 윤덕영이 자신의 딸을 위해 지은 집이었는데 박노수화백이 인수해 작품활동을 하고 자신이 쓰던 고가구등과 미술품등을 종로구청에 기증해 현재는 관광객들에게 유료로 개방되고 있다. 실내는 사진촬영 불가라 아쉬웠지만, 삐그덕 거리는 바닥의 소리가 참 좋다.
‘취적(吹笛)-피리소리展’ 기획전시로 무위자연에 기반을 둔 수묵담채화 ‘취적’과 산 능선이 화면을 가득채운 '한운호래왕' 등 잘 몰랐던 한국화의 한 페이지를 감상할 수 있다.
외부에는 산책로가 조성돼 있어 건물 뒤편으로 올라서면 서촌의 경관도 한눈에 볼 수 있다.
글·사진=고미선 기자 misunyd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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