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숙(충남대 교수) |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이육사, <절정>) 시인이 목도한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는” 현실은 완료된 시간이 아니다. 식민지의 칼날 위는 산업화를 겪는 동안 공장 굴뚝으로 옮겨왔다.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수도파이프 수리공인 난쟁이 아버지와 인쇄소에 다니는 어머니, 그리고 가난한 가정 형편으로 노동을 해야 하는 두 아들 영수와 영호, 그리고 주머니 있는 옷을 입고 싶은 막내 영희, 이렇게 힘겹게 살아가는 다섯 식구의 일상을 그린다. 재개발 사업으로 철거 계고장이 나오지만 돈이 없어 이들은 거리로 내몰린다. 아버지는 집에서 쫓겨나지 않을 방법을 찾지 못했고, 사랑의 릴리푸트읍을 꿈꾸었던 난장이 아버지는 공장 굴뚝에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다.
소설의 배경은 아이러니하게도 ‘낙원구 행복동’이다. 짐작대로 굴뚝은 우리가 사는 사회 현실을 상징한다. 같은 공간에서 함께 일하지만 ‘갑을관계’, ‘일일노동자’, ‘하청’, ‘미생’, ‘비정규직’의 처지로 차별 대우를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원치 않았음에도 약자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최소한의 인간적인 행복을 위해 한 가정의 가장들이, 어머니들이, 자식들이 굴뚝에 올라가야 하는 ‘난장이들’이 지금 이곳에서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외줄에 몸을 지탱하며 아파트 외벽을 청소하다 목숨을 잃은 노동자, 시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과로가 일상화된 버스 기사, 돌봄이 없는 고독사와 폭염에 폐지를 줍다 운명을 달리한 노인의 죽음, 안전장치 없이 위태롭게 매달려 일하는 에어컨 기사, 촌각을 다투어 일해야 하는 택배 기사와 음식배달원. 일할 기회마저 없는 청년들, 영혼을 벼리려 배고픔을 감내해야 하는 예술가들, 차별과 배제의 냉대를 받는 성소수자들, 가뭄과 홍수로 신음하는 이재민과 농민들… 열거할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삶의 곳곳이 위태로운 굴뚝이고, 그곳에서 우리들은 모두 난민이다.
굴뚝이 막히면 그을음과 유독가스에 덮여 질식하고 병든다. 바람이 잘 드나들 수 있도록 굴뚝은 뚫려 있어야 한다. 막히고 얽힌 문제들이 있을 때 외면하지 않고 함께 문제를 풀어내려는 의지와 소통의 노력이 절실하다.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있어 우리가 살아갈 수 있다. 굴뚝은 밥을 위해 투쟁하는 절벽이 아니라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 나누는 따듯한 통로이어야 한다. 더 이상 고공 굴뚝에 올라가지 않아도 좋은 세상, 시린 굴뚝에 오르지 않아도 따듯한 밥을 함께 먹을 수 있는 사회가 행복한 공동체이다.
벼랑 끝의 사람들. 칼날과 굴뚝에서, 거리와 일터에서 실존과 생존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 벼랑을 또 다른 벼랑으로 잇대면 길이 될 것이다. 죽임을 살림으로 바꾸는 환대의 길들. 청포도가 익어가는 칠월에 ‘고달픈 몸’을 맞이해 줄 하이얀 모시수건 같은 사람들과 공동체를 믿고 의지하며 힘들고 아프지만 조금만 버티고 견디면 좋겠다.
10여년 전 수없이 이어진 의문과 자책과 내 안의 물음들로 몹시 힘들었던 때가 있었다. 답을 찾기 위해 걷고 또 걸었다. 벗들의 위로가 있었지만 외롭고 쓸쓸했다. 막막함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어렴풋이 빛이 보였다. 겨울이 강철로 된 무지개라고 말한 시인의 성숙한 목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타인의 상처에 공감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자신을 추스르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보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통 후의 시간은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괜찮다고 스스로를 토닥이면 다른 이의 마음도 쓰다듬을 수 있다. 꺾인 무릎을 세우며 다시 희망을 찾아보겠노라 썼던 그때의 몇 줄을 옮겨 본다. 지친 당신에게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사람들은 가야할 길이 있다. 그 길을 가는 동안 다른 사람들과 만나 동행하기도 때로는 혼자 걸어가야 할 때도 생긴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 해 방황할 때도, 어려운 고비를 넘겨 안도의 숨을 쉴 때도 있다. 삶은 원점으로 되돌릴 수 있는 길이 아니다. 가야할 길이 있어 아름다운 나이. 가는 것 자체가 즐거운 삶이기에 발을 내딛는다. 지금 나는 그 길 위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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