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5일 6.25전쟁 기념사에서 이낙연 국무총리의 기념사 중 일부분이다. 백마고지나 다부동 전투는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한국전쟁 주요 격전지다. 그러나 ‘개미고개’가 총리의 입을 통해 언급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개미허리처럼 잘록한 형상을 하고 있어 이름 붙여진 ‘개미고개’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금강방어선과 대전을 공격하기에 앞서 반드시 지나야 하는 길목이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인민군은 이곳에서 4일간 남하하지 못하고 발이 묶여 있었다. 막강한 전투력을 자랑하던 인민군 최정예 부대가 개미고개에서 4일을 허비한 이유는 무엇일까? 개미고개 전투를 기술한 한국전 관련 자료와 연기군 향토지, 그리고 주민들의 증언을 빌려 67년 전 개미고개에서의 전투를 시간별 상황에 따라 재구성했다.
▲ 50년대 21연대 1대대 지휘소의 모습이다. 이곳은 예로부터 집이 두채만 있다하여 '두집메'라 불렸다. 일본어 구사가 가능했던 스미스 대대장은 집주인에에 일본어로 집을 지휘소로 쓰게 해달라 요청했다고 한다. |
▶1950년 7월 8일 오후 21연대의 준비태세
천안에서 철수한 미 21연대는 금강 방어선을 앞두고 세종시 전동면 동교리와 미곡리에 두 곳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제1방어선은 ‘학교산’이라 불렀던 산등성이와 오얏고지(현 베어트리 파크 앞 언덕)에 구축하고 미곡리 운주산 능선(개미고개 식당 뒤)과 맞은편 작성산 능선에 제2방어선을 구축했다. 개미고개 남서쪽 5km 지점 보덕리에는 11포병대를 배치하여 개미고개 일대에 대한 화력 지원을 하도록 했다. 연대 본부는 조치원에 있었다.
전투준비에 앞서 미군은 전의면 일대 주민들에게 피난을 종용했다. 1대대장 스미스 중령은 ‘두집메’라 불리는 2채의 가옥(현 동교리 산21번지)에 대대 지휘소를 차렸는데 스미스 중령이 직접 집 주인 김순배씨에게 집을 양보해 줄 것을 부탁했다. 훗날 김씨의 조카 김종철 씨의 증언에 의하면 “집 주인과 스미스 중령은 일본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했다”고 한다.
▲ 개미고개 전투의 시간별 전투 현황 |
▶7월 9일 전의-조치원 방어선 첫 전투
8일 천안을 점령한 인민군 4사단(소장 이권무)은 9일 오전 세종시 전의면 일대에 진입했다. 전방에 미군이 방어선을 치고 있음을 인지했지만. 미 공군의 폭격을 의식했던 북한군은 전력을 파악하며 반나절을 대기한다.
북한군의 움직임은 정오가 지나면서 긴박하게 돌아갔다. 미군 지휘부에는 적의 전차가 천안에서 남쪽으로 남하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온 상태였다. 전투는 오후3시들어 시작됐다. 북한군은 전차를 1번 국도(현 운주산로:전의역→조치원 방향)를 따라 한 줄로 앞세우고 그 뒤를 200~300명의 보병들을 따라 붙였다. 적의 공격을 포착한 D중대장 알카이어(Charles R. Alkrire) 대위는 곧바로 항공지원을 요청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군의 전투기가 북한군 전차에 대한 폭격에 나섰다. 유유히 남하하던 북한군 전차는 로켓탄 공격을 맞고 뒤 이어 11포병대의 155m 곡사포와 1대대의 4.2인치 박격포 공격을 받았다. 전차를 따르던 보병들은 일제히 분산됐다. 다시 전열을 갖추고 공격했지만 연속된 박격포 공격에 다시 흩어졌다. 희생자가 속출하자 북한군은 공격을 잠시 멈췄다. 이날 전투 기록에 의하면 북한군 전차 15와 차량30대가 파손 됐다고 전하고 있다.
▲ 1대대 지휘소 '두집메' 도로 옆에 있는 '오얏고지'다. 오얏나무가 많다 하여 붙여진 이 언덕은 1대대 1개 소대가 지키고 있었다. |
조치원 방어선의 첫 전투는 인근에 대피하고 있던 주민들에게도 포착됐다. 당시 19세로 전의면에 거주했던 김상현씨(86)는 “미군 비행기가 하늘을 뱅글뱅글 돌다가 인민군 전차에 포탄을 쏘았는데 산 전체가 울릴 정도로 화력이 상당했으며 마을 일대는 검은 연기가 곳곳에서 타올랐고 인민군들이 가옥 사이를 분주히 오고 갔다”고 당시 모습을 증언했다.
예상 밖의 격을 입은 북한군 4사단은 공격 원점으로 북상하고 이후의 전투는 진행되지 않았다. 연대장 스테판 대령은 종군기자 비가트 기자와 함께 제1방어선 진지로 이동해 밤을 세우게 된다.
▲ 개미고개 정상에 있는 자유 평화의 빛 기념탑. 이곳에서는 2005년부터 매년 개미고개 전사자들을 위한 추모제가 열리고 있다. |
▶7월 10일 미군-북한군의 공방전
(1)무너진 제1방어선
7월 10일 이날은 새벽부터 안개가 심하게 깔렸다. 전방으로부터 인민군의 움직임이 포착됐지만 짙은 안개로 확인이 불가했다. 북한군은 요란사격(상대를 교란시키기 위한 사격)으로 미군 부대의 위치를 파악한 후 7시가 되면서 박격포로 공격했다. 북한군의 공격은 도로 건너편 오얏고지에 집중하는 듯 했다. 스테판 대령은 박격포 지원 사격으로 대응했지만 그 사이 주진지 능선의 동쪽을 우회하여 올라온 북한군의 공격을 받았다. 전차 역시 방어선을 뚫고 부대 후미까지 진출했지만 안개가 심해 이를 확인하지 못했다.
오전 8시 안개가 걷히고 나서야 북한군 전차가 1방어선 진지 후미까지 진출한 사실을 인지했다. 8시30분이 지나면서 박격포 진지와의 통신도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9시경에는 1대대 진지 정면에 대한 공격이 시작됐다. 스테판 대령은 포병대에 사격 지원을 요청해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도록 했다.
잠시 소강상태를 이어가던 북한군은 11시30분경 오얏고지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다. 고지를 지휘하던 빅슬러 중위는 유선 전화로 스태판 대령에게 “사상자가 너무 많아 지원을 해주거나 철수명령을 내려달라”고 요청했지만 박격포 진지와의 통신 두절로 지원이 불가했다. 스태판 대령은 빅슬러 중위에게 현 지점을 고수할 것을 명령하고 오얏고지에 대한 항공지원을 요청했다. 이윽고 미 항공대의 오얏고지에 대한 기총소사가 이어졌으나 이후 빅슬러 중위와의 연락은 없었다.
한편 후방의 11포병대에선 1대대와의 통신이 두절되자 방어선이 무너졌다고 판단하고 제1방어선 진지 위로 포사격을 실시했다. 이로 인해 1대대는 적의 공격과 아군의 포사격을 동시에 받는 최악의 상황에 이르게 되면서 부대 전체가 와해됐다. 지휘부와 몇 명의 병사만 남게 된 상황에서 스태판 대령은 더 이상의 방어가 무의미하다 판단하고 제2방어선으로 철수했다.
(2) 3대대의 역습, 한국전쟁 첫 전차전
제2방어선으로 철수한 스태판 대령은 12시경 3대대장 젠슨(Carl C. Jensen) 중령에게 제1방어선 탈환을 명령하고 자신은 조치원으로 복귀했다. 젠슨 중령은 오후2시를 기해 제1방어선 탈환작전에 나서게 되는데 이때 미군의 경전차도 투입됐다. 한국전쟁 최초의 전차전이 개미고개에서 시작된 것이다.
젠슨 중령은 전차의 지원을 받아 진지를 재편하고 있던 북한군을 공격해 빼앗겼던 제1방어선 주진지를 탈환했다. 그러나 건너편에 있던 오얏고지는 여전히 북한군이 장악한 상태로 밤을 맞이하게 됐다. 3대대의 상황을 보고 받은 24사단장 딘(William F, Dean) 소장은 “조치원을 상실하면 한국군의 보급로를 잃게 된다”고 강조했지만 “필요하다면 원래의 3대대 진지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전선의 상황이 불리하다고 판단한 젠슨 중령은 늦은 밤 야음을 이용해 부대를 제2방어선으로 회군시켰다.
▶7월 11일 피로 물든 개미고개
7월 11일 새벽,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3대대에 대한 북한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진지 보안과 지뢰 매설로 밤을 보낸 3대대는 이번에도 짙은 안개와 먼저 싸워야했다. 북한군의 화력도 전일보다 강해졌다. 4사단 후방에서 정비를 마친 3사단(소장 이영호)이 교체 투입된 것이다. 북한군 최정예 부대인 3사단은 3대대 지휘부에 대한 집중포격으로 통신소와 탄약저장소를 연달아 파괴함으로써 지휘체계를 마비시켰다. 또한 탄약고에서 시작된 연쇄 폭발로 대대 본부 병력 상당수가 희생되기에 이른다.
▲ 성곡페터널 현재 모습이다. 인민군의 무기 창고로 쓰였던 이곳은 현재 한 농가의 비료창고로 활용되고 있다. 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개미고개에서 후퇴한 미군들이 이곳에서 다수 희생됐다고 전하고 있다. |
밤사이 구축한 지뢰지대는 어찌된 일인지 북한군의 전차를 막지 못했다. 북한군의 전차는 3대대의 방어진지까지 접근했다. 1000명으로 추산되는 보병들은 3대대 주진지를 좌우 측면으로 포위 공격하고 일부 병력들은 멀리 우회하여 후방으로의 도로를 차단함으로써 부상병 후송과 재보급을 방해했다.
지휘부 건너편 작성산 방어진지도 북한군이 중대본부까지 몰려와 기관총 사격으로 희생자가 급증하고 있었다. 밀리고 버티기를 반복했던 전투는 정오 무렵까지 계속되었으나 진지를 이탈하는 병사들이 급증하면서 3대대 전체가 와해되기 시작했다. 젠슨 중령은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 판단하고 철수 명령을 내렸다. 개미고개가 북한군에게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젠슨 중령을 비롯한 3대대 병력은 산개된 상황에서 개별적으로 조치원 방향으로 철수했다. 이 과정에서 젠슨 중령과 정보장교 젝슨 중위가 조천을 건너다 개미굴(현 성곡페터널)인근에서 기관총 공격으로 전사하고 작전장교 레스터 중위와 L중대장 콕스, 인사장교 케시 중위도 실종됐다.
한편 북한군 포위망을 뚫고 조치원으로 집결한 3대대 대원들은 장교8명에 사병 142명이 전부였다. 667명에 달했던 3대대가 병력의 60%이상을 잃고 장비도 대부분 손실을 입은 것이다. 사단장 딘 소장은 3대대의 패배 소식을 접하고 조치원 방어선의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 조치원과 금강에 이르는 교량에 장애물을 설치하고 금강 이남으로의 철수를 준비했다.
▶7월12일 미21연대 금강방어선으로 철수
후방에 있던 병력을 보충 받은 1대대장 스미스 중령은 조치원에서 재정비 하던 패전 병력을 흡수하여 부대를 재편했다. 그리고 조치원 서북쪽 3km 무명고지에 진지를 구축했으나 12일 오전 2000여명에 달하는 북한군이 또 다시 포위 공격을 해왔다. 연대장 스테판 대령은 전일 3대대의 패배가 반복될 것을 우려해 스미스 중령에게 철수를 지시했고. 스미스 중령은 조치원으로 병력을 집결시킨 다음 차량으로 남하해 금강 남쪽의 대평리로 철수했다. 4일간의 개매고개 전투가 마무리 되는 순간이었다.
개미고개 전투이후 21연대가 방어했던 동교리와 미곡리 일대는 미군 전사자들의 시신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당시 17살이었던 이영석(86 당시19세)씨는 “미군의 시신이 마을 입구부터 논과 밭, 개미굴(현 성곡 페터널) 입구와 주변 도랑과 도랑 사이에 즐비했다”며 “한참 더운 날씨로 인해 미군 시신의 부패가 심화되면서 마을 전체가 시신냄새로 진동했다”고 증언했다. 읍내리에 거주했던 하재훈(86. 당시 19살)씨는 “미군이 방어선을 쳤던 동교리 언덕에 올라가보니 미군의 시신이 참호 속에 뒤엉켜 있고 몸이 온전한 시신이 없어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고 전했다. 마을 여기저기 수습되지 못했던 미군의 시신은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하면서 수습됐다고 주민들은 전했다.
▲ 두집메 미2연대 1대대 지휘소 현재 모습이다. 1대대에 집을 빌려즌 김씨의 친척들이 여전히 살고 있다. |
▶개미고개 전투의 성과
미 21연대의 개미고개 전투는 국군 1군단의 보급로를 확보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었다. 개미고개에서의 4일간의 방어 지연전으로 국군은 조치원-청주 구간의 보급을 가능하도록 했고 이후 청주 방어선에서의 안정적인 후퇴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미25사단과 미군 제1기병 사단의 상주-영동 일대 투입 등 후방 지역의 미군 전개와 국군 주력부대가 전열을 갖추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한편 북한군은 조치원 전투에서의 타격으로 인해 작전지속 능력이 크게 둔화 됐으며 전차를 앞세워 밀고 내려오는 전술도 개미고개 전투이후 수정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미 항공대의 활약은 개미고개 지연전의 공신이었다. 훗날 북한 105전차 사단의 정치군관이었던 오기완 대위는 전의-조치원 전투에서 전차와 차량 상당수가 파괴되자 “개전 이래 입은 가장 큰 손실이었으며 대공 장비를 갖추지 않고 전진만 하다가 그들 항공기의 좋은 밥이 된 샘이다”라고 증언해 당시 조치원에서 입은 정신적인 충격이 상당했음을 인정했다.
▲ 미21연대 3대대가 지키고 있던 개미고개(좌) 작성산(우)능선이다. 두 고지 사이로 경부선 철도와 국도, 조천이 흐르고 있다. |
▶67년 후 개미고개 곳곳에 남겨진 전쟁의 상흔
67년이 지난 현재 개미고개 전투 현장에는 미군 전사자들의 희생을 기리는 ‘자유평화의 빛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는 2005년부터 개미고개 전사자들을 기리는 추모제가 11년째 이어지고 있다. 2015년에는 전사자가 428명으로 최종 확인됐으며 이들의 이름이 새겨진 동판과 미군 동상이 건립됐다. 개미고개 능선에는 지금도 참호 흔적이 남아있는데 국군 유해발굴단의 발굴 조사에서 소총과 탄피가 다수 발견됐다. 위령비 건너편 언덕 아래에는 ‘개미굴’이라 불렸던 성곡페터널이 지금도 남아있다. 개미고개 전투 후 한동안 북한군의 탄약고로 쓰였는데 현재는 농가의 비료창고로 활용되고 있다. 21연대 1대대가 지휘소를 차렸던 동교리 ‘두집메’는 예로부터 집이 두 채만 들어서 있어 ‘두집메’라 불렸는데 현재는 4채의 가옥이 남아있고 미군에게 집을 빌려준 김순배씨의 친척들이 거주하고 있다.
▲ 전의-조치원 방어선 전투에서 북한군에 맞서 싸우고 있는 미21연대 소속 병사들 |
▲ 드론으로 촬영한 개미고개 항공사진, 경부선 철도와 조천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
세종시 군의원으로 활동했던 황순덕 전 의원은 개미고개 전투 지역에 대한 성역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황 전 의원은 “개미고개 전투는 6.25전쟁의 판도를 바꾼 위대한 승리였으나 다른 지역의 전투에 비해 저평가 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국가기관과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나서 세종시를 대표하는 안보교육장으로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전투 당시를 기억하는 마을 주민들은 세월이 갈수록 개미고개 전투가 잊혀져가는 현실에 아쉬움을 나타냈다. 미곡리 주민 이영석(74)씨는 “나는 그때 나이가 어려서 죽는 것이 뭔지도 몰랐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남의 나라 땅에서 죽은 젊은 친구들 덕에 우리나라가 이 만큼 잘살게 된 것 같다”며 “우리는 죽으면 그만이지만 당시의 기억과 사실들은 후세에 이어지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 개미고개 정상부 언덕(개미고개 식당 뒤)에 남아있는 진지 흔적 |
*참고문헌 : 6.26 한국전쟁사(국방부). 전의면 향토지(세종시 전의면사무소). 전쟁기념관(전쟁.군사정보)
금상진 기자 jod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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