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제동원역사관 전경 |
일제기업 구리광산 개발에 동원된 이는 조선인
휴일 없는 주ㆍ야 2교대에 감시 속에서 중노동
눈썹처마 형태의 일본식 건축물 그대로
서점에서 애써 고른 책을 5년 가까이 묵혔다가 최근 들어 술술 읽히더니 여행까지 떠나게 됐다. 국민일보 기자들이 쓴 ‘일제 강제동원, 그 알려지지 않은 역사’라는 책은 탄광 속에서 숨을 가빠했을 우리 징용피해자 선인들을 생각하게 했다. 조선시대보다 더 멀게 생각하던 강제징용의 역사를 바로 어제의 일로 송환시켜줬으며, 급기야 부산까지 강제동원 다크투어를 떠나게 하는 계기가 됐다.
바다가 아름다운 부산은 사실 전북 군산과 마찬가지로 일제시대 우리의 자원과 생산품, 심지어 사람까지 일본에 공출되는 수송항이었다. 경부선, 동해안선, 입항철도 등의 선로가 만들어지고 조선방직과 조선금속주신회사가 설립됐으며 김해비행장, 수영비행장, 동굴진지 등의 군사시설이 갖춰졌다. 이들 가덕도 새바지 동굴진지를 비롯해 미군 제55보급창, 감천마을, 매축지 마을은 일제시기 조선인을 강제동원해 중노동을 시킨 현장들이다. 그래서일까 2015년 12월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이 부산 남구에 개장했고 이번 여행의 목적지로 삼았다.
▲ 강제동원역사관 내부 |
먼저, 해운대에 숙소를 잡고 다음날 역사관을 찾기에 앞서 기장군 일광면 광산(鑛山)마을을 먼저 찾아갔다.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돼 중노동에 시달린 곳을 보면 물론 일본 현지가 6600여 곳으로 가장 많고, 동남아에서도 있었지만, 국내에서도 강제징용이 이뤄진 현장이 많다.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전쟁승리를 위해 총동원체제를 구축했고, 1938년 5월부터 국가총동원법을 만들어 한반도의 인력과 물자를 제멋대로 빼앗았다. 일광 광산마을은 조선 내 5대 구리광 중 하나였던 일광광산이 있었고, 일본 스미토모 광업주식회사에 의해 1930년대 개발된 강제동원 현장이 보존된 전국 몇 안 되는 곳이다. 당시 일본인들은 이곳 광산에서 구리를 캐려고 조선인을 강제로 동원했는데, 쉬는 날 없이 매일 주간과 야간 2교대로 채광에 동원됐다고 한다.
등산로가 된 야트막한 산을 오르면 당시 강제동원된 부모형제가 손이 터지도록 곡괭이 질을 했을 폐광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만, 폐광에서 흘러나오는 오염된 지하수를 정화하기 위해 한국광해관리공단이 정화수조를 설치해 가까이 접근할 수는 없었다. 광산을 내려오면 작은 마을이 나오는데 이곳은 당시 일본인 간부급 사택과 주변에 일반 사택을 만들면서 형성됐다. 지금도 마을 가장 높은 곳에 간부급 사택이 있으며 지붕 밑에 눈과 비를 막는 눈썹 처마를 하나 더 설치된 일본양식의 건축물이 눈에 띈다. 지금은 폐광 이후 정착한 주민 20여세대가 생활하는 작은 마을이 됐으며, 좁은 골목에서 사진기를 들이대는 외지인을 못마땅히 여겨 주민들과 대화하지는 못했다.
국내 유일 강제동원역사관 2015년 개관
강제동원 개념과 역사 실체를 한눈에
강제동원 최대 수혜기업 어딘지 궁금증 유발도
▲ 역사관 제공 |
조선인의 강제동원 피해 규모는 일본이 정리한 통계에 의하면 강제동원 피해 규모는 최소 782만7355명(중복 동원 포함)으로 추정된다. 물자에 한정해 사용하는 공출이라는 용어를 조선 민중에게 거리낌 없이 사용했는데 남녀노소 모두 해당하며 군인, 노무자, 군무원, 일본군 위안부의 형태로 동원했다. 일본 기업이 후생성이 필요 인원수를 신청하면 지역별로 할당인원을 책정해 조선총독부를 중심으로 행정ㆍ경찰ㆍ철도청ㆍ소방서 등 모든 공권력이 개입해 강제동원시켜 일본 등의 목적지로 집단 수송했다. 송출이라는 이름의 집단수송 목적지는 일본이 될 수도 있고 중국 또는 태평양 일대의 섬 등 일제가 전쟁을 수행하는 모든 곳이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다음날 다시금 찾아간 곳은 남구에 있는 일제강제동원역사관이었다. 광안대교를 지나 산비탈이 많은 부산답게 자동차로 고개에 한참 올라서야 역사관 앞에 설 수 있었다.
역사관에서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백발노인의 1인 시위였다. 통영이 고향인 아버지를 강제동원 도중 폭격으로 잃고 유족으로도 인정됐으나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정부는 강제동원 피해자와 그 유족을 위로하고자 2008년부터 지원금을 지급하고 있으나 대상은 국외강제동원으로 제한돼 국내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가족은 원천 배제된 현실을 실감했다.
역사관은 지상 7층 규모로 강제동원 수기, 사진, 일기장 등의 많은 유물이 전시돼 있고 피해당사자의 실제 육성을 이어폰을 통해 청취할 수 있다. 충남 금산이 고향이면서 1942년 강제동원에 아버지는 일본 북해도 아사지노비행장 공사장에, 아들은 한 해 뒤 규슈 소재 탄광으로 동원된 한 가족의 이야기는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또 노동조건이나 근무환경에 대한 정보 없이 동원돼 작업장과 숙소에서도 감시와 통제를 받았으며, 정상적인 노무자라면 당연히 받아야 했을 임금은 공제당하고 숙비비와 노동장비에 대해서도 사용료를 내야 했다. 수십 종에 달하는 각종 저금제도와 노무자연금, 후생연금제도(임금의 11%)에 강제로 가입돼 손에 쥔 임금은 없었다. 그러고도 폐전 후 해당 금액을 지급하지 않고 일부 기업은 일방적으로 공탁해버렸다는 사실도 역사관에서 파악할 수 있었다.
4층 관람실은 강제동원 배경과 피해증언을 5층에는 광복시기까지 다양한 강제동원 당시의 모습을 모형을 재현해놨다. 관람을 끝내며 드는 의문이 있었다. 역사관에서 징용의 대상자는 ‘조선인’으로 표기했는데 ‘국민’과는 다른 것일까? ‘일제’라는 반복된 표기 역시 ‘일본’과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라는 부분이다. 일제의 뒤에서 강제동원의 가장 큰 수혜를 본 일본 기업들 이름을 발견할 수 없어 아쉬움을 샀다. 역사관을 모두 둘러본 후 옥상에 마련된 강제동원에 희생된 선조의 영혼을 위로하는 추모의탑 앞에서 묵념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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