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재민(신탄진평생학습도서관 사서)
어릴 적 우리 집은 많은 토끼를 사육하였고 자연스럽게 토끼 잡는 것도 많이 보았다. 그래서인지 나는 어려서부터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람이 죽으면 그 후엔 어떻게 될까? 죽으면 끝이고, 그대로 없어져버린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하고 괴로웠지만, 죽음 이후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늘 잊고 지내는 것이 바로 ‘죽음’이다. 나와 전혀 관련 없는 누군가의 사망소식을 접할 때, 보통 나와는 딴 얘기라는 듯 (마치 나는 죽지 않을 것처럼) 반응하게 된다. 사람은 예외 없이 한번 태어난 이상 언젠가 꼭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언제인지 모를 뿐 너무나 모순적이게도 탄생과 동시에 죽음도 시작된다는 것이다.
평소 죽음과 삶에 대해 자주 생각하는 내게 폴 칼라니티의 ‘숨결이 바람 될 때’는 좀 더 삶을 진지하고, 의미 있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더 굳혀주었다. 죽음은 결코 부정(不正)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앞에서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고, 지금 살아있음에 감사할 수 있게 해주며 어려움을 극복하고 인생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는 평소 지론을 저자의 회고록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폴 칼라니티는 서른여섯 젊은 나이에 폐암에 걸려 어린 딸과 역시 의사인 아내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난 신경외과 의사이다. 그는 스탠퍼드 대학에서 영문학 학사, 석사 과정을 거치는 동안 인생의 의미와 죽음의 현상에 깊은 관심을 느끼고 공부했다. 뇌와 의식, 삶과 죽음 사이의 공간에서 살게 되면 연민을 베풀 줄 아는 삶이 되고 스스로의 존재도 고양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스탠퍼드 의학 전문대학원에 입학하여 의과 대학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고 인간의 뇌를 주로 다루는 분야인 신경외과를 선택하여 스탠퍼드 병원에서 수련의 생활을 마쳐가던 중 폐암이 발병하고 재발하여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는 미래의 촉망받는 탁월한 의사였으나 무의미한 형식주의에 사로잡혀 기계적으로 질병을 치료하고 기술적인 탁월함만 있는 의사가 되려하지 않았다. 그가 정말 훌륭한 의사라 칭송받는 큰 이유는 환자와 가족들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의료행위를 다할 뿐만 아니라 (어떤 의술로도 도울 수 없는 지경의)환자와 가족이 죽음이나 질병을 잘 이해하도록 따뜻한 말로 돕는 의사였다는 것이다. 그는 고난이도의 수술을 결정할 때 자신의 능력에 대한 정확한 평가와 환자가 누구인지, 또 그가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는지 깊게 이해하려 했다.
실례로 그는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중환자실 침대에 앉아 있는 35살 한 여자 환자(뇌에 양성 종양)를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 보았다. 낯선 장소에서 외로움을 느끼고 뇌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걱정하는 모습을 보고, (수술 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위험과 예상되는 합병증을 무심하게 떠들어대면 수술을 거부할 것이고, 그러면 차트에 환자의 수술 거부라 쓰고 내 일은 여기서 끝났다고 생각하며 다음 일로 넘어갈 수 있는 쉬운 방법이 있음에도) 그녀와 가족을 한 데 불러 모아놓고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들에 대해 차분하게 얘기를 나눈 뒤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왔다.
폴은 의사이자 환자로서 죽음과 대면했고, 또 그것을 분석하고, 그것과 씨름하며,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는 사람들이 죽음을 이해하고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도록 돕고 싶어 했다. 그런 그에게도 죽음은 예외일 수 없었다. 폴은 자신이 치료한 환자들이 누운 그 침대에 누워 담담하고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환자들을 위해 죽음에 맞서 싸우던 의사가 정작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 아주 모순적인 상황을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해 이처럼 생생하면서도 가슴 저미도록 전달해 주는 책은 적을 것이다.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찾아온다. 의사에게도 환자에게도. 살고, 숨 쉬고, 대사 작용을 하는 유기체로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향해 속수무책으로 살아간다. 죽음은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주변 사람들에게도 일어나는 일이다. 책을 읽으면서 잠깐 그의 입장이 되어보고 ‘나도 이런 상황에 처하면 이런 기분이구나…조만간 나도 저런 입장이 되겠지’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 폴이 이 책을 쓴 이유이다. 이 책은 죽음을 선정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할 수 있을 때 인생을 즐기라고 훈계하지도 않는다. 그저 우리가 걸어가는 이 길 앞에 무엇이 있는지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한번 뿐인 인생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을 적극 추천한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