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영 첫 단편집…종잡을 수 없는 주인공과 배경들
2013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한 소설가 유재영의 첫 소설집 ‘하바롭스크의 밤’이 발간됐다.
‘하바롭스크’라는 지명처럼, 소설집은 낯설고 거대한 숲(세계)을 멀찍이서 조망하고, 그 속에 서 있는 각각의 침엽수(개인)를 밀착하여 조명한다. 숲이라는 현실 세계에 갇힌 개인의 욕망과 충동을 젊은 작가 유재영은 남다른 스케일과 이종적 상상력으로 풀어낸다.
‘하바롭스크의 밤’의 스케일은 남다르다. 한국을 교집합으로 하여 적도, 러시아, 필리핀, 아이슬란드 등 전방위로 뻗어 간다. 작가는 마치 이야기를 찾아 초점이 맞춰지는 망원경을 지닌 듯하다. 이 망원경에 포착되는 낯선 장소에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가 겹쳐지며 현실의 폭을 확장하는 소설적 공간이 탄생한다.
표제작 ‘하바롭스크의 밤’은 자신의 운명을 이고 러시아 하바롭스크 벌목장에 흘러든 두 남자의 탈출기로, 그들의 운명이 형상화된 것 같은 ‘늑대의 늪’이라는 기묘한 분위기의 숲이 등장한다. ‘네 개의 눈’은 한국 교회의 부패와 부정을 피해 필리핀 마닐라로 이주한 젊은 목사를 향한 복수극으로 머나먼 두 나라 사이를 잇는 악행의 지도를 그려 낸다기존 사회에서 밀려나거나 도망쳐 온 이들이 도착하는 곳은 이전 세계와 단절된 장소이지만, 곧 인물들의 운명을 함께 뒤집어쓰거나 운명의 공기에 전염되어 연결된 장소가 되어 버린다. 이처럼 유재영은 성능 좋은 망원경으로 서로 다른 시공간과 이야기를 탁월하게 중첩시킨다.
또한 작가는 이야기를 멀리 보낼 뿐만 아니라 깊이 파고드는 것에도 능하다. 작가가 자신에게 무수히 던졌을 질문은 마술적, 공상과학적 디테일을 덧입으며 소설로 변모한다. 수록작 「만화경」은 19세기 러시아의 대문호 고골, 체호프, 고리키가 써낸 걸작들이 만화경에 의해 쓰여졌다는 일화를 소설로 쓰는 한국의 소설가에 대한 이야기다.
‘Keep going’에는 대신 소설을 써 주는 ‘언더라이터’라는 워드 프로그램이 등장한다. 한국의 신인 작가 ‘박인성’은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 ‘테드 권’의 태블릿 피시를 훔치고 ‘언더라이터’로 쓰여진 소설을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한다. 소설 쓰기에 관한 두 소설은 작가적 욕망과 판타지를 담고 있는 동시에 쓰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보여 준다. “당신은 할 수 있습니까?” ‘Keep going’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던지는 이 의미심장한 질문은 유재영의 첫 소설 세계를 여는 열쇠이기도 하다.
현실도 가상도 아니지만 현실이면서 가상인 곳, 말하자면 증강현실 같은 것, 그 어지럽고 무한한 공간이 유재영 소설을 읽는 우리의 감각을 계속해서 확장시킨다. 수많은 현실 앞에서, 이제 책을 덮는 우리에게 탈주하지 않을 이유는 없어 보인다. “행선지 같은 건 알 게 뭐냐. 어쨌든 도망쳐라, 도망쳐라, 어디까지든.”유재영 지음. 민음사. 296쪽. 1만2000원
박수영 기자 sy87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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