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터지는 아우성 드높았다. 1960년 3월8일. 민주의 목숨을 위해 자유의 광명을 찾아 파도처럼,
대전의 학생의기 양양했다. 우뚝했다. 무지한 총부리도 비겁한 방망이도 못난 바리케이트도
모두 기세를 잃고 정의의 깃발을 울린 역사의 불꽃 진실로 뜨거웠다. -증언의 얼굴. 김용재-’
4.19 혁명의 기폭제가 된 대전의 3.8 민주의거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요구되고 있다.
3선을 연임한 이승만 박사를 또다시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갖가지 선거 부정사건이 일어나자 대전의 순수한 학생들은 역사의 현장으로 뛰어들었고 이 움직임이 도화선이 돼 4.19 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1960년 3월 8일부터 10일까지 자유당 독재정권의 부정부패에 항거해 대전고 1000여 명의 학생들을 비롯한 대전상고 600여 명의 학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사건의 발달은 이렇다. 2월 28일 이른바 대구학생 ‘데모’사건이 신문에 보도되자, 모든 학생들의 심정은 불안과 공포, 울분에 휩싸인다. 학생들은 모이기만 하면 시국을 논하고 부정과 부패에 대한 반발심을 갖고 있었다. 3월 7일 오전 수업도중 학생간부들이 교장관사로 불려간다. 충남도 당국의 지시였고 한참만에 돌아온 학생들은 불평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8일 열리는 민주당 정견 발표에 대전고 학생들은 가지말라는 교장의 지시가 있었던 것. 7일 수업을 마친 학생 간부들은 교내 도서관 옆에 모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표정은 누구나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다음날 민주당 정견 발표를 계기로 전교생이 데모를 감행하자는 합의에 도달한다.
학생들은 8일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학생들의 결의문 낭독이 이어지자 무장경찰이 이를 제지하고 나선다. 경찰들은 학생들을 무지막지하게 폭행하기 시작했다. 머리가 깨지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채 엎치락 뒤치락했다.
경찰과의 충돌은 50여 명이 파출소로 연행되면서 마무리됐다.
대전의 3.8 민주의거는 4.19 혁명으로 이어진다. 이날 의거에 참여했던 일부 학생들과 교사는 평생을 시위 후유증으로 살아가야 했다. 일부 학생(40회, 송모씨)은 경찰의 무자비한 폭행으로 고막이 터지고 평생 장애를 안고 지내왔다.
4.19에 동참했던 대전고 출신 졸업생 3명은 4.19 혁명 당시 희생되기도 했다.
대전시민들의 무관심 속에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던 3.8 민주의거는 2000년대를 전후해 3.8 의거 주역들의 노력으로 역사적 의미가 새롭게 인식됐으나 아직까지도 대전시민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현재 ‘3.8 민주의거 기념 사업회’는 매년 기념식과 학술세미나 등을 열고 있으며, 서구 둔지미 공원내에 3.8민주의거기념탑을 세웠다.
김용재 3.8민주의거 기념 사업회 단장은 “대전 시민들에게 있어서 4.19 혁명은 3.8민주의거가 발단이 된 혁명으로 기억돼야 한다”며 “민주주의의 발전에 공헌했고, 도화선의 역할을 한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이라고 말했다. 김민영 기자 miny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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