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이승만 대통령 피신에 임시 수도
충남도청사 중앙정부로 도지사공관은 청와대로 활용
제19대 대선을 앞두고 세종시의 행정수도 완성을 골자로 하는 공약이 쏟아지고 있지만, 인접한 대전시가 한때 대한민국의 수도(首都)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시간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50년 6월 27일 오전 북한의 공격에 의정부가 함락됐다는 소식을 접한 뒤 주위의 권고를 받아 극비리에 경무대(현재의 청와대)를 떠나 피난길에 올랐다. 이 전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날 낮 12시께 대구에 도착했지만, 서울로 올라가겠다는 이 전 대통령의 고집에 다시 발길을 돌렸다. 오후 4시 이 대통령의 피난열차가 대전에 머물렀다.
이 전 대통령은 대전역에 나온 이영진 충남지사와 윤치영 내무장관 등을 접견한 뒤 다시 서울로 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윤 장관 등의 만류 등에 대전역 철도국장실에서 잠시 쉬게 된다. 이 전 대통령은 신성모 국방장관의 전화와 드럼라이트 미 대사관 참사관의 방문에 서울행 의지를 꺽게된다. 유엔이 북한의 남침에 대한 군사적 행동을 결의했고,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미군의 한국 파병을 명령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이 전 대통령은 이 소식에 정부를 대전으로 옮기게 했다.
이 가운데 이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자신은 대전에 피난온 사실은 알리지 않은 채 서울에 건재하다는 것을 알리는 거짓 방송을 실시한다. 이 전 대통령을 수행했던 이철원 공보처장은 임지호 충남도 공보과장을 불러 방송내용과 같은 내용의 대통령 담화문을 찍게 했다.
그러나 담화문을 실고 서울로 갔던 비행기가 서울 함락 소식을 전하면서 이 전 대통령은 국민 앞에 정부의 대전 천도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 소식을 접한 국민은 분노했다. 피난민은 대전으로 몰려들었고, 당시 13만에 불과했던 대전은 일주일도 안돼서 사람들이 몰려 100만명의 인구가 됐다.
충남도청 각 국장실은 장관 사무실로 쓰여졌고, 도청은 임시 중앙청사가 됐다. 도청 회의실은 임시 의사당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신익희 의장 주재로 열린 정부와 국회 간담회에서 38선 회복을 약속했던 것과 달리 대통령 홀로 비밀리에 피난했다는 책임 추궁이 제기됐고, 이후 국회 수뇌부가 이 전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 건의를 요구하는 등 반목이 거듭됐다.
이 대통령은 7월 1일 갑작스레 비서들을 깨워 부산으로 가자고 했다. 경호관인 김장홍 총경이 대구와 추풍령 지역에 공비가 있을 것이라는 정보가 있다고 보고하며 목포를 통해 부산으로 가야한다고 제안한다. 이 대통령이 탄 기관차는 이런 탓에 목적지를 호남선으로 돌렸다. 이 대통령이 대전을 떠났지만 행정은 대전에 남은 정부에서 계속됐다. 그러나 부산에 있는 이 대통령과 일일이 전화 결재를 받아야하는 불편함이 이어졌고, 전황이 불리해지면서 육군본부가 대전으로 후퇴했으며 정부는 7월 16일 대구로 남하기로 했다. 이로써 3주만에 대전은 대한민국의 수도 지위를 내려놓게 된다. 강우성 기자 khaihid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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