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구역 정식화 갑오개혁기 회덕군 대전리부터 시작
해방 후 대전시로 개칭, 대덕연구단지·엑스포로 도시 확장
대전시는 얼마나 오랜 역사를 지녔을까.
지난 2014년 대전(大田)이라는 도시가 탄생한 지 100년이 됐다. 오는 2019년엔 대전시가 출범한 지 70주년을 맞이하며, 대전시가 충남도에서 독립된 광역자치단체인 직할시로서의 형태를 띈 지도 30년이 된다. 지난 1999년엔 서구 둔산으로 시청사가 옮긴 바 있다.
그러나 대전은 선사시대부터 우리 조상이 살았던 곳이고, 조선시대 중엽 이후 시대를 주도했던 송준길·송시열 선생이 이끄는 기호학파 본거지였을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때 공주 유림의 반발 등에 1904년 지금의 대동 인근에 대전역이 지어지고 이듬해인 1905년 경부선 개통, 1914년 호남선 개통으로 내륙철도의 중심지로 부상하는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도시다.
▲대전의 시작= 대전은 조선시대 회덕현과 진잠현, 공주목 일부가 합쳐진 곳으로, 지금같이 하나의 도시가 아니었다.
대전의 한자 지명으로 기록된 것은 동국여지승람이고, 조선 숙종 초산일기에 대전이라는 표기가 나온다.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는 대전천 일운관전천으로 있다.
그러나 대전이 공식적인 지명으로 등장한 것은 갑오개혁이 일어난 1895년 회덕군 산하 대전리(현재의 중동·정동·원동 일원)라는 기초 행정구역이 정식화되면서부터라는 게 학계의 설명이다. 단, 도시의 모습은 경부선 철도 부설과 함께 정착한 일본인들에 의해 이뤄진다. 일제강점기인 1910년 회덕에 있던 군청이 대전리로 이전하고, 1914년 일제에 의해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회덕군과 진잠현, 공주군 현내면 등이 통합돼 대전군이 만들어진다.
1935년 대전은 지금의 광역시격인 대전부로 승격하게 되며, 그 경계가 지금 시 경계의 모태가 된다. 해방된 뒤인 1949년 대전부가 대전시로 개칭된다. 대전시라는 명칭이 생긴 게 이때부터다. 해외동포들이 대전에 들어와 자리를 잡았으며,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의 유입에 인구가 대거 늘어났다. 1960년 급격한 도시화와 공업화로 인구 급증이 이뤄졌으며, 1963년 유천동과 회덕, 산내가 시로 편입됐다.
▲대전의 발전= 오늘날 대전시라는 도시가 확장성을 띄게된 것은 경부고속도로의 착공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부산시 금정구 구서동을 시작으로 서울시 서초구 양재동까지를 잇는 경부고속도로 가운데 대전시 구간은 19.1㎞였다. 1968년 2월 착공해 이듬해인 1969년 12월 10일 부분 개통, 1970년 9월 17일에 전 구간이 개통됐다. 이를 통해 대전에는 철도와 고속국도가 지나는 교통의 요지라는 의미가 다시 부여됐다.
대전시가 발전하게된 데는 대덕연구단지의 영향도 있다. 당초 대덕연구단지는 1973년 7개년 계획으로 수립됐지만, 유류파동 등에 1984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첨단과학기술 개발로 과학기술 발전을 선도하고 연구기관 집중으로 산학연 공동연구를 촉진하겠다는 목적에서였다. 이를 기반으로 대전은 1989년 대덕군과 유성군을 통합, 인구 100만명을 돌파해 직할시로 승격했다.
1993년 대전은 또다른 발전의 동력을 얻게된다. 바로 대전엑스포다. 새로운 도약의 길이라는 주제와 전통기술과 과학의 조화라는 부제 등으로 열린 엑스포에는 93일간 108개국이 참여했고, 이는 대전이 크게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이때 광역시로 명칭이 변경됐다. 1997년엔 중앙행정기관의 지방이전으로 균등한 지역발전을 도모하는 차원에서 대전에 정부청사가 건립된다. 입주는 1998년부터 이뤄졌지만 주요 부처의 이전을 통해 대전은 대한민국 행정의 한 축으로 발돋움하게 됐다. 이같은 도시 규모 팽창에 맞물려 1999년 대전시는 서구 둔산동에 신청사를 준공했다. 강우성 기자 khaihid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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