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라져가는 것들과 이순간 살아있는 청춘의 아름다움에 경의를 표한다
[주말여행]진해 벚꽃축제
▲진해 여좌천. 벚꽃이 터널을 이뤄 장관이다. |
속절없이 가는 건 세월만이 아니다. 속절없이 흐르는 건 강물만이 아니다. 피고지고 피고지고, 짧은 봄이 못내 아쉬워 저 꽃들은 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되풀이하듯 피었다가 어느새 스러져간다. 서둘러야 한다. 언제 왔나싶게 미처 작별도 고하지 못하고 눈깜짝할 새 이 봄은 떠나버릴 테니까 말이다. 몽롱한 잠 기운에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쳐들고 꿈결인 듯 마주한 진해는 이역만리를 달려온 것처럼 낯설다. 기껏해야 대전에서 버스로 세시간 거리인 이 도시는 벚꽃의 향연으로 들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진해는 처음은 아닌 것을, 생각하면 아득하기만 하다. 20대 후반 청춘이 고꾸라질 즈음, 나와 후배는 작정하고 산넘고 물건너 벚꽃축제에 동참했건만,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될 줄 알기나 했겠는가. 수십만 그루의 진해 벚나무는 도대체가 꽃을 피울 기미는 없이 봉오리를 앙다물고 있었다. 맙소사!
하루종일 관광버스에서 시달리며 달려온 보람은 도로아미타불이었다. 오는 내내 어느 동네 부녀회에서 떼거지로 온 '아줌마'들은 물만난 고기들 마냥, 버스 안에서 신나게 노래하고 먹고 춤추느라 진을 빼기에 여념이 없었다. 도로에서 차가 밀려 잠시 멈춰 서면 부녀회원들의 댄스로 차가 흔들려 옆 차에서 낄낄거리며 손가락질했다. 덕분에 나와 후배는 창피해서 몸을 아래로 숨기기에 바빴다. 그들은 관광버스에서 내려 벚꽃이 피었는지 안피었는지는 관심없고 버스기사를 희롱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 춘삼월 꽃놀이의 정취에 들뜬 아낙들은 대통령 할애비도 당할 재간이 없어 보였다.
▲벚꽃 모양의 액세서리. |
이번엔 허탕치지 않은 게 분명하다. 창원에 들어서자 도심은 온통 벚꽃으로 분분했다. 이곳은 벚꽃을 위한 도시임에 틀림없다. 언제 그랬냐싶게 졸음은 싹 달아나고 꽃구경하느라 고개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렸다. 창원에서 진해로 가는 길은 무릉도원으로 가는 것처럼 신비스럽고 황홀했다.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이번만큼은 진심으로 화사한 벚꽃이 날 반겨주길 원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지만 옅은 잿빛 구름이 깔린 하늘은 햇살 한줌 내주지 않는다. 머플러로 목을 단단히 감싸고 캐시미어 장갑까지 꼈지만 봄날의 한기는 뼛속 깊이 파고들었다. 쌀쌀한 꽃샘바람이 어린 손자랑 아웅다웅하는 구십 노파의 잔소리처럼 까탈스럽다. 진해 여좌천에 가서야 비로소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아이고, 참말로 아름답구나.” 어디 멀리서 왔는지 한 무리의 할머니들도 함박웃음을 터트리며 감탄사를 연발한다. 솜사탕처럼 보송송한 탐스런 벚꽃은 하늘아래 오직 인간을 위해 존재하고 있었다. 이 순간이 영원할 것만 같다. 거기엔 분노도 슬픔도 없었다. 저쪽 어딘가에는 위선이 있고, 저쪽 어딘가에는 궁핍이 있고, 저쪽 어딘가에는 죽음이 있는데 말이다. 아름다움은 멸시할 수 없는 것. 꽃잎 쏟아져 내리는 벚나무 둥치 밑에서 관능에 진저리치는 여행자가 어느 소설가 뿐일까. 바다 건너온 중국인들과 이국적인 옷차림의 이교도인들의 호들갑스러움 속에서 나 역시 천지간에 아득히 소멸되어가는 한 점 관능에 떤다.
▲수양회관<왼쪽>과 원해루. 수양회관은 1920년대 지어진 중국풍의 건물이다. 원해루는 6.25 당시 중공군 포로 출신이 연 중국식당으로 지금도 운영한다 . |
바람결에 흩날리는 벚꽃 아래서 두 여자의 싱그런 웃음소리에 또다시 벚꽃은 속수무책으로 떨어진다. 진해 벚꽃 구경하러 대만에서 온 여자들이다. 눈부신 벚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주고 떠듬떠듬 콩글리시와 손짓 발짓으로 대화를 나눴다. 아직 앳돼 보이는 여자들은 서른살 동갑내기 친구란다. 귀엽다고 했더니 눈을 초승달로 만들며 까르르 웃음을 터트린다. 벚꽃과 젊은 여자들의 절정. 저 꽃은 내일이면 바람에 날려 어디론가 흔적없이 사라질 것이다. 인간의 젊음도 곧 생기를 잃고 죽음을 맞는다. 그래서 세상의 살아있는 존재들은 더없이 애틋하고 서글프다. 망망대해 바다 한가운데서 벚꽃이 지듯 죽음을 맞이한 가미카제 청년들은 그 순간 무슨 생각을 했을까. 조선의 청년은 고향 집에서 눈물짓는 어머니를 생각했을까. ‘대일본제국’의 청년은 지고한 천황에 충성을 맹세했으려나. 찬란한 봄의 한 가운데서 모든 사라져가는 것들과 지금 이 순간 살아 있음에 경의를 표해야겠다.
벚꽃 천국 진해는 일제 강점기 일본인에 의해 만들어진 근대 도시다. 동아시아의 바다를 제패하기 위한 전략적 계획도시였던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진해는 우리 해군의 모항이 됐다. 진해 곳곳은 일본식 주택과 상가 형태를 띤 집들이 남아 있다. 진해역, 수양회관, 진해 요항부 병원장 관사, 진해 우체국, 진해해군기지사령부…. 그리고 사쿠라꽃이 핀다. 진해 사람들은 일제의 잔재를 유산으로 삼아 삶을 이어간다. 산다는 건 특별하지 않다.
▲진해 군항제 전야제의 거리 퍼레이드. |
여행정보: 진해군항제가 10일까지 열린다. 대전역에서 창원역까지 가는 KTX가 있다. 두시간 걸린다. 대전복합터미널에서 가는 버스도 있다. 첫차가 6시 30분으로 세 시간 소요된다. 워낙 유명한 벚꽃 축제인만큼 많은 사람이 몰려 승용차를 갖고 가면 애를 먹는다. 창원까지 가서 주차해 놓고 시내버스나 셔틀버스를 이용하는 게 수월하다. 축제기간 중 버스전용차로를 운행한다. 서울에서 진해역까지 팔도관광열차도 운행한다. 맛집은 알다시피 마산 아귀찜이 있잖나. 창원· 마산·진해가 통합돼 창원시가 됐다. 진해에서 유명한 원해루에서 짬뽕을 먹었는데 이맛도 저맛도 아니다. 역사성이 있어서 손님이 많다. 짜장면은 맛있다고 하던데….
글· 사진= 우난순 기자 rain4181@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