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간의 온도/박정은/다온북스/2016 |
기분이 울적한 날, 특별한 스트레스 해소법이 있으신가요? 저는 컴퓨터에 저장해놓은 옛날 사진들을 꺼내보곤 합니다. ‘저 때 참 재미있었는데’, ‘그 친구는 지금 뭐 하고 있을까?’, ‘저기 안 간 지 오래 되었는데,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하며 기억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기분이 조금 나아지곤 하더군요.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볼까요? 평소 텔레비전은 잘 보지 않으시던 부모님께서 ‘7080 특집’ 방송을 하는 날이면 하던 일도 멈추고 집중하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저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노래와 약간 촌스러운 의상을 입고 춤추는 모습을 별 감흥 없이 보는 저와 다르게, 반짝반짝한 눈빛과 흐뭇한 미소로 열중하시는 게 참 신기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시간이 흘러 현재 제가 즐겨듣던 노래들이 10년, 20년 뒤에 보게 된다면, 저 또한 부모님과 같은 모습일 것 같네요.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지난날에 대한 기억들은 우리 삶을 즐겁게 해주는 큰 원동력이지요. 그 때 그 시절로 돌아가고픈 분들이 참 많을 것 같아요. 눈뜰 때마다 새로운 것들이 발명되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아쉽게도 타임머신의 발명은 아직입니다. 시간을 돌릴 순 없지만, 그래도 우리 곁에 공간은 남아있지요. 물론 전과 같은 모습으로 남아있긴 힘들지만, 시간과 함께 우리가 변해왔듯, 공간 또한 세월에 때를 입은 채로 우리 곁에 남아있습니다.
‘나를 품어주는 일상의 사소한 곳들’이라는 소제목을 가지고 있는 책, ‘공간의 온도’를 읽었습니다. 차분한 톤으로 일상적인 공간이 그려져 있어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편안해 보이는 표지에 이끌려 읽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제자리 걷기, 가까이 걷기, 느리게 걷기, 멀리 걷기, 다르게 걷기.’ 총 다섯 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책상, 침대 밑, 소파와 같이 우리를 매일 품어주는 집안 곳곳의 생활공간부터 꽃집, 미용실 등 동네 한 바퀴를 걸으면 볼 수 있는 정겨운 공간, 설레는 마음으로 작정하고 떠나는 여행지까지 저자가 살면서 지나온 공간에 대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직접 그린 일러스트와 함께여서 저자가 그리는 공간들을 함께 살펴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책을 읽음으로써 큰 깨달음이나 교훈을 얻은 것은 아니지만, 이 책은 제가 살아온 공간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계기를 주었습니다. 저자는 책을 통해 ‘공간이 주는 위로는 생각보다 크고 강하다. 그런 공간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공간이 위로해준다는 말이 생소했지만 저를 품어준 공간들을 떠올려보니 이내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저는 어릴 적 살던 집이 있는 동네 근처만 가도 떠오르는 옛날 생각과 함께 느껴지는 뿌듯하고 뭉클한 기분이 좋아 지금도 종종 찾아가곤 합니다. 친구들과 약속이 있을 때도 가까운 번화가를 제쳐 두고, 굳이 학부 시절 누비던 대학가 거리를 찾아 어쩐지 들뜨는 기분을 즐기기도 했고요.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이유 없이 했다고 생각했던 행동들이 사실은 공간에게 위로를 받고 싶어서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의 몸짓에 불과하던 그에게, 내가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 시인의 시처럼, 면과 면이 맞닿은 네모일 뿐이던 공간이 내가 머무름으로써 그 자체에 의미가 깃들 수 있다는 점이 참 신기합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발자국들을 끊임없이 남기며 살아갑니다. 지난날의 나, 지난날의 우리가 그리워질 때면 남겨둔 발자국을 따라 대화를 거듭하며 힘을 얻지요. 기억 속에, 혹은 내 발아래의 공간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대화할 수 있는 매개체로 남아주어 고맙게 느껴집니다. 오늘 내가 숨 쉬는 이 공간도 내일의 내가 그리워할 공간이라는 생각에 닿으니, 종일 앉아 있어 지겹게 느껴졌던 이 책상도 조금은 사랑스러워 보이네요.
나영은 대전학생교육문화원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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