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3월 8일 오후 3시 30분, 공설운동장에서 민주당이 선거강연을 하고 있을 때 약 300여 명으로 추산되는 대전고 2학년 학생들이 학교에서 나와 도로에 정렬했다.
대흥로타리를 거쳐 민주당의 유세장소인 공설운동장으로 뛰어 갔지만, 입구에 늘어선 교통순경과 경비경찰관의 제지로 유세장에 들어가지 못했다.
학생들은 인동쪽으로 달려 대전천 제방으로 올라 갔는데 이와같은 돌연한 행동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경찰은 학생들을 제지하기 급급했다. 부상자가 있을 것으로 보였다.
학생들은 다시 대열을 갖춰 가면서 중고다리를 건너 역전을 돌아 도청으로 향해 달려가다 목척교를 건너려 했지만 경찰이 길을 차단했다.
이틀 후인 1960년 3월 10일 대전상고 학생들은 이 소식을 듣고 같은 결의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경찰은 정보를 사전 입수해 학생 대표들을 연행했다.
하지만, 정상적으로 조회시간까지 학생 대표가 돌아오지 않고 경찰에 붙잡혔다는 소문이 퍼지자 상고학생 600명이 뛰쳐나와 시위를 했다.
대전공고와 보문고는 교원들 수십명이 교문을 지키며 시위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막아섰다.
대전고와 대전상고를 중심으로 대전지역 학생들이 자유와 민주, 정의를 위해 불의에 항거했던 당시의 모습을 중도일보에선 이같이 전했다.
이 학생운동는 이승만의 자유당 독재정권의 횡포와 부패, 빈곤과 불법적 인권유린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대전지역 고등학생들이 중심이 돼 일어난 민주적 저항운동으로 기록됐다.
대전 3.8 민주의거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같은 해 2월 28일 대구 학생들의 시위에 이어 전국 두 번째 학생운동이기 때문.
이 운동으로 독재에 저항하는 분위기가 전국적으로 퍼져 마산의 3·15부정선거 규탄 시민항쟁으로 이어졌다. 민주화운동들이 모여 4·19혁명의 계기를 마련,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단초가 됐다는 평가다.
57년이 흐른 이날을 맞아 한국 정치발전사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지역의 학생운동이 다시 재조명되고 있다.
3·8 민주화운동이 지역을 넘어 한국 정치사를 뒤흔들었던 만큼 후손에게 귀감이 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나서 알려야 한다는 데 따른 것이다.
이와 관련, 대전시는 해마다 3·8 민주의거 운동 기념탑 아래에서 기념식을 거행하고 선열들의 숭고한 뜻이 기리는 행사를 치르고 있다.
기념탑은 지난 2000년 대전시 서구 둔산동 둔지미 근린공원 내에 부지 3300㎡에 높이 25m 규모로 세워졌다.
유승병 대전시 자치행정과장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발전에 토대가 됐던 3.8 대전 민주의거의 역사적 사실과 숭고한 정신은 충절의 고장인 충청의 자랑”이라며 “앞으로도 어린 학생들이 이 민주정신을 배울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구창민 기자 kcm2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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