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훈 대전시의회 의장 |
최근 몇 달 동안 국민들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이름은 단연 '최순실'이 될 것이다. 양파껍질 벗겨내듯 자고나면 터지는 새로운 의혹과 비리를 접하며, 많은 국민들은 분노와 성토의 단계를 지나 허탈감과 무력감에 휩싸였다. 1%의 가진 자, 이 나라가 그들만의 천국일 것이란 의혹이 확신으로 변해가는 순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질리도록 들은 그 이름 석 자에 피로감을 느낀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사건이 발생한지 오늘로 꼭 2년 9개월이 됐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날, 온 국민을 실의와 슬픔의 수렁 속으로 밀어 넣은 세월호. 그 때 우리는 SNS 프로필 사진마다 노란리본을 걸어 희생된 아이들을 애도했지만, 추도의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너무 큰 슬픔에 사람들은 일상에서 우울감을 느끼는 '세월호 피로현상'을 경험했고, 아픈 기억을 잊기 위해 의식적으로 기억을 회피했다. 그렇게 각자의 마음 깊숙한 곳으로 세월호는 침잠해 버렸다.
그것이 살아남은 자들의 살아가는 방식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세월호를 그렇게 가슴에 묻어서는 안 되었다. 어쩌면 그것은 지금 드러나는 대한민국의 몸집 큰 부정·부패의 일면이었을 것이며, 후에 불어 닥칠 폭풍을 예고하는 전조증상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이제 우리 국민은 더 이상 발만 동동 구르며 보고만 있지 않는다. 얼룩진 대한민국의 민낯과 마주할 용기가 있고, 또 그래야만 이 사회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창, 칼을 드는 대신 비록 촛불을 들었지만 시민들의 의지는 어느 때 보다 확고하며, 그렇게 소리 없이 혁명을 이뤄가고 있다.
혁명의 이유가 '최순실'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새해가 밝은지 보름이 지났지만, 뉴스나 신문은 온통 무거운 이야기들뿐이다. 가계부채 1300조원 시대에 국민 대다수가 빚쟁이로 살아간다. 소비는 위축되고 기업의 매출감소는 고용부진과 투자 축소로 이어져 더 많은 실업자를 양산한다. 좁은 취업문을 뚫고자 30만 명에 육박한 공시생들이 사활을 걸고 시험에 매달린다. 설상가상으로 발병한지 두 달이 되도록 AI(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는 종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3천만 마리의 닭·오리가 살처분 되면서 양계농가의 생계가 막막해졌다. 그나마 서민밥상에 올라오던 달걀반찬마저 수입에 의존해야 한다. 새해 초지만, 희망을 가져보기엔 주변상황이 좀체 어둡기만 하다. 한때 우리에게 주어졌던 '기회'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아직 남아있긴 한 걸까? 최순실 일당이 우리에게 빼앗은 가장 큰 보물은 '희망'이다. 나는 못 배웠어도 자식만큼은 어떻게든 공부시켜서 잘살게 하려고 허리띠를 졸라맸던 우리 모두의 부모를 조롱하는 말, “돈도 실력이며, 능력이 없으면 부모를 원망하라”는 말은 갈 데까지 간 양극화와 세습되는 부(富)의 횡포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그러나 사불범정(邪不犯正), 사악한 것은 바른 것을 감히 범하지 못한다 했다. 단군 이래, 수천 년의 역사를 거쳐 오면서 우리에겐 숱한 위기가 있어왔다. 그때마다 우리는 슬기와 지혜로 헤쳐 나왔고, 우리 몸 속 어딘가에는 위기돌파 유전자가 각인돼 있을 것이다. 격동을 예고하는 2017년이지만, 거대하게 밀려오는 파도가 두렵지 않은 것도 바로 그런 국민들, 시민들이 있기 때문이다.
“거기도 그럽니까. 돈 있고 빽 있으면 무슨 개망나니 짓을 해도 잘 먹고 잘 살아요? 그래도 20년이 지났는데… 뭔가 바뀌었겠죠.”
공전의 히트를 친 드라마 '시그널'에서 과거의 형사 '이재한'은 2000년대의 형사에게 이렇게 묻는다. 다시 20년이 지나 필자에게 누군가 이렇게 물어온다면, 지금 우리는 살맛나는 세상에 살고 있다고 답할 수 있기를 바란다.
김경훈 대전시의회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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