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처럼 갑천은 흐르고 있었다. 대전 엑스포다리에서 유림공원까지 오늘도 유유히 흐르는 갑천을 따라 뛰다보니 빛바랜 갈대가 서걱거리며 맞는다.
물에 비친 야트막한 언덕과 마른 나무들 사이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금세 긴 인간 띠가 만들어진다. 아빠의 손을 잡고, 16개월 딸아이의 유모차를 밀고, 여자친구의 찰랑거리는 머릿결을 매만진다. 구순(九旬)을 바라보는 노옹(老翁)은 이미 기나긴 삶의 마라톤을 달려왔으리라.
아득한 삶의 연속이다. 생각해보면 삶이란 나를 지키고 나의 사람들을 곁에서 지켜내는 것이었다. 시간이 가져다놓은 새해의 문턱 앞에서 사람들은 서로 맨살을 부대끼며 함께 완주해야 할 긴 인생의 마라톤을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정유년 1월 1일 11시 11분 11초 대전 엑스포광장 일원에서 ‘2017 대전 맨몸마라톤대회’가 열렸다. 산소소주 O2(오투)린을 생산하는 대전·세종·충청대표 주류기업 (주)맥키스컴퍼니(회장 조웅래)가 주최한 것으로 지난해에 이어 올해 두 번째다.
대회명 그대로 남성 참가자들은 상의를 벗고 여성은 민소매 등 간편한 복장으로 엑스포다리부터 유림공원을 거쳐 다시 돌아오는 7㎞코스다. 겨울추위가 한창인 1월 맨몸으로 뛰어야 하는 이색적인 대회에 남녀노소 지역불문 2000여 명이 찾았다.
조웅래 회장은 개회사를 통해 “2회를 맞은 맨몸마라톤대회에 지역민들은 물론 전국에서 많은 시민들이 찾아줘 감사하다”며 “새해 첫날 아름다운 갑천변을 달리며 새로운 각오를 다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맥키스오페라단의 축하공연과 새해를 알리는 난타공연이 끝나고 레이스가 시작됐다.
40∼50대 중년여성들은 몸을 드러내는 게 민망한 듯 마스크를 썼고 늙거나 젊은 아빠들은 상반신에 보디페인팅을 했다. 올해 대입을 앞둔 자녀가 원하는 대학에 가기를, 늦은 나이에 얻은 첫 딸아이가 건강하길 바랐다.
유모차를 밀며 갑천누리길을 달리던 김건수씨는 “나이 마흔에 얻은 첫 딸 보민이가 건강하게 자라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번 마라톤대회에 참가했다”며 “육아 등으로 한동안 운동을 못하다 달리니 상쾌하다”고 말했다.
재수 끝에 새해 대학생이 된 이유진씨(21)는 언니 가윤씨(24)의 손을 잡고 있었다. 유진씨는 “지난해 힘들었던 수험기간을 정리하고자 언니와 마라톤을 뛰게 됐다”면서 “대학생으로서 본격적으로 놀 나이인 만큼 새해엔 건강도 챙기며 열심히 놀고 열심히 공부하고 싶다”고 웃음 지었다.
이번 대회 최고령 참가자인 양세우씨(88)도 노익장을 과시하며 속도를 냈다. 반환점을 돌아온 양씨는 “걷기와 뛰기로 건강을 지켜왔다. 지난해 대회 참가했던 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 다시 대회장을 찾았다”고 말했다.
마라톤 시작 한 시간여 뒤인 정오가 되자 남녀건각들이 속속 결승점에 들어온다. 기다리고 있던 가족들이 나와 반긴다. 1등도 꼴찌도 없다. 각자의 페이스대로 마라톤 코스를 완주했을 뿐. 문승현 기자 hey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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