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여행] 포항 구룡포
아주 오랜 옛날, 아이 주먹만한 탐스런 눈송이가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참새들의 짹짹거리는 소리에 뒤뜰 대숲에 한 자나 쌓인 눈이 와르르 무너진다. 장작을 여민 아궁이의 불이 어찌나 활활 타던지 군불 때는 엄마 옆에서 누렁이가 꾸벅꾸벅 존다. 처마 밑 고드름이 아버지 팔뚝만하게 굵어지면 엄마는 저녁 준비를 서두른다. 통통한 아지 너덧마리에 무를 숭덩숭덩 썰어넣은 얼큰한 찌개로 그날 저녁 우리 집 밥상은 진수성찬이 따로 없다. 올망졸망 흥부네 가족처럼 두레반에 둘러앉아 아귀다툼하며 먹는 아지찌개는 어찌나 맛난 지, 두툼한 무는 또 어찌나 뜨거운 지 혀가 델 지경이었다. 어릴 적 먹었던 아지찌개를 잊을 수 없다. 그때는 아지라는 생선이 흔했다. 고등어와 비슷한 아지는 지금은 시장에 가도 볼 수가 없다. 그래서 더 애틋하다. 칼바람이 몰아치는 동지섣달 긴긴 겨울이 오면 우리 식구는 그 시절 먹었던 아지찌개의 추억을 소환한다.
겨울이 되면 포항은 분주해진다. 포항 구룡포 바닷가는 지금 집집마다 과메기 말리느라 여념이 없다. 동해의 검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해풍에 코끝을 간질이는 과메기의 비릿한 내음은 그 맛이 어떨까 자못 궁금해진다. 과메기의 어원은 청어의 눈을 꼬챙이로 꿰어 말렸다는 관목(貫目)청어에서 유래됐다. 예전엔 청어가 많이 잡혔으나 지금은 꽁치가 대신한다. 사실, 과메기란 말은 숱하게 들어 알고 있지만 한번도 먹어보질 못했다. 하여, 겨울이 가기 전에 과메기란 놈을 맛보기로 작정했다. 일기예보에서 반짝추위가 올 거라면서 옷 단단히 여미라고 해서 중무장하고 왔는데 웃옷을 하나 벗어야 했다. 구룡포의 하늘과 바다는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르렀다. 꺄아악 꺄아악 갓난아기마냥 칭얼대는 듯한 갈매기의 울음소리는 내 목덜미를 자꾸만 긁어댄다.
아랫지방이라 아직은 온화한 날씨 때문인지 이제야 김장을 하는 모양이다. 집집마다 아낙들은 시퍼런 배추를 쪼개서 소금에 절이기 바쁘다. 말을 걸어도 눈길 줄 새도 없는지 경상도 특유의 심드렁한 대꾸만 날아올 뿐이다. 햇볕에 그을려 시커먼 얼굴에 골이 파인 노인은 대문밖 의자에 앉아 한가롭게 담배를 빨고 있다. 노인은 지나가는 여행자를 흘낏 쳐다보곤 먼 바다를 응시한다. 첨단문명을 달리는 시대이지만 남녀의 역할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 같진 않다. 다음 생이 있다면 남자로 태어나서 폼나게 한번 살아 볼까? 해풍에 흔들리는 건 과메기만이 아니었다. 처마 밑 메주와 무청 그리고 옥상 빨랫줄에 넌 빨래와 오징어가 창공에서 펄럭인다.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 한달음에 달려갔다. 처음 보는 고기 무더기 옆에서 그물에 걸린 고기를 떼내는 중이었다. 청어란다. 우와! 이게 청어야? “옛날엔 청어를 마이 묵었지만서두 지금은 귀해. 사람 입맛이 다 제각각이라 어떤 이는 청어과메기가 맛있다꼬 하고 어떤 이는 꽁치가 좋다꼬 하는데. 과메기는 몬살 때, 보리흉년 들어 배고플 때 묵었던기라.”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쩌렁쩌렁 기력좋게 얘기하는 박석조씨(70)는 젊은 날 25년을 상선을 탔다. 영국만 빼고 안 가본 나라가 없다. “우리는 일본 아아들 몬 따라간다. 걔들은 공공물건 절대 안 건드려. 마, 철두철미한기라. 대통령? 언 놈이 해도 다 마찬가진기라요. 정치한다는 놈들 다 썩어빠졌다.” 과메기를 아직 한번도 못 먹어봤다니까 박석조씨는 내 손을 잡아끌고 집으로 갔다. “옛날엔 통으로 말렸는데 지금은 생산성 높이려고 배지기(고기를 반으로 가르는 것)해서 2~3일이면 마르제. 맛좀 보소.” 첫 맛은 물컹하면서 비린내가 나서 거북했지만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함이 입안 가득 퍼져 자꾸 손이 가게 되는 게 과메기였다. 초고추장 찍어먹는 것보다 그냥 먹는 게 과메기 본래의 맛을 느낄 수 있다니까 박석조씨는 과메기 먹을 줄 안다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과메기는 낮밤의 기온차가 커야 한다. 밤엔 얼고 낮엔 녹으면서 그렇게 몇날 며칠을 거쳐 숙성돼 독특한 풍미가 어우러진 육포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스페인의 하몽, 이탈리아의 살라미가 그러하고 중국 윈난성 소수민족의 부엌 천장에 매단 돼지 뒷다리가 연기에 그을려 기가 막힌 맛을 낸다는 것을 어찌 알았을까. 맛의 기억은 강렬하다. 오래전 헤어진 연인의 체취를 기억할 순 없어도 그와 함께 먹은 갈치조림의 기억은 혀의 돌기에 착색되어 지워지지 않는다. 봄날 나른한 오후 한적한 대흥동 거리를 거닐며 친구와 먹은 아이스크림은 또 어떤가. 박태준의 신화가 살아있는 포항의 과메기는 바닷가 사람들의 허기를 면해 주었다는데, 지금은 가슴 시린 추억으로 숙성되고 있을까.
가는길=대전에서 포항가는 KTX가 하루에 10대 있다. 1시간 20분 걸린다. 무궁화호는 동대구역에서 환승해야 한다. 4시간 소요. 버스는 대전복합터미널에서 1시간에 1대꼴로 간다. 3시간 10분 걸린다.
먹거리=포항하면 단연 과메기와 물회가 유명하다. 과메기는 호불호가 갈리는데 개인적으로 처음 먹어보고 반했다.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죽도시장은 생선에 관한한 천국이다. 싱싱함이 살아있다. 겨울엔 물회대신 회덮밥 강추! 살을 발라낸 뼈로 끓인 매운탕과 나오는데 정말 맛있다.
글·사진=우난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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