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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WCA 위장결혼 사건 모습/사진=1992년 11월 22일자 동아일보 자료사진 캡쳐 |
“민주화를 위해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하 박정희)의 심복이었던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방아쇠를 당긴 이유였다. 그러나 괴물 같았던 유신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박정희가 죽자 이튿날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됐고, 당시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이 11월10에 충격적인 시국담화를 발표했다. 내용인즉 유신헌법에 따라 간선제, 즉 3개월 이내에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체육관선거로 새 대통령을 선출한다는 것이었다.
담화의 내용은 비로소 민주주의의 ‘새 날’을 맞이하려 했던 국민들의 희망을 무참히 짓밟는 발표였다. 분노가 터져 나왔고, 그 가운데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등 민주화운동 단체 5곳이 잇따라 성명을 내고 격렬하게 항의했다.
그러나 계엄령 상황에서 큰 집회를 여는 것조차 쉽지 않자, 합법적으로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방법으로 ‘가짜 결혼식’을 짜냈다.
37년 전 이날(24일), 명동성당 인근 YWCA회관에서는 이상한 결혼식이 열렸다. 분주하게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는 신랑은 연세대 복학생 홍성엽이었고 그날의 주인공인 신부는 윤정민 이었다. 축하를 해주러 온 하객들의 면면은 함석헌, 윤보선, 한명숙, 백기완 등 재야인사들로 가득했다.
북적대는 식장에서 이상한 점은, 그날의 꽃인 신부의 모습을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혼식이 시작됐고 신랑은 위풍당당하게 입장하면서 민주주의 선언문을 우렁차게 낭독했고 유인물을 식장에 뿌렸다.
재야인사들을 미행해서 결혼식에 참석한 경찰들이 식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계엄군도 들이닥쳤다. 신랑 홍성엽은 말할 것도 없고 불법집회 이유로 축하객으로 참석한 백기완 등 민주 인사들이 보안사에 끌려갔고, 신군부의 서슬 퍼런 탄압을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다.
이날 열린 결혼식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대통령 보궐선거를 반대하는 시위였다. 끝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신부 윤정민’은 민주화운동 단체 간부였다가 세상을 뜬 윤형중 신부의 성을 빌려왔고 ‘민정(民政)을 거꾸로 해 ‘정민’으로 이름을 붙인 가공의 인물이었다.
민주주의 값은 비쌌다. 가짜 결혼식까지 하면서 저항해야 했던 처절한 역사였다. 지금 300만 촛불이 대로를 밝힐 수 있는 것은 지나한 역사의 이런 순간들이 만들어낸 열매가 아닐까.
김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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