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여행] 충북 제천 박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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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달재 고갯길이 이른아침 안개와 단풍이 어우러져 가을 정취를 물씬 풍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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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의 여파인 지 간이 콩알만한 나로선 선뜻 경상도 쪽으로 발을 떼기 어려웠다. 고즈넉한 늦가을이 오면 따사로운 햇살 받으며 경주 남산을 옛 신라인들의 숨결을 느끼며 거닐자고 작정했건만, 다음으로 미뤘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겁 많기로는 세상 따를 자가 없으니 말이다. 해서 충북 제천으로 가을여행을 떠났다.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 경상도 박달 선비와 제천 백운면 평동리 금봉 처녀의 이루지 못한 사랑의 고갯길 박달재. 남녀간의 사랑만큼 통속적이고 숭고한 건 없다. 그래서 사랑은 부조리하다. 왜 기쁨으로 충만해야 할 사랑이 종국에는 상처로 범벅이 되는지 알 수 없다. 하긴 그 상처의 더께가 향기로운 사람으로 키우기도 한다. 옛 처녀 총각의 한숨과 눈물로 얼룩진 고갯길을 걷지 않고는 이 가을, 사랑에 대해 논할 수 없을 것 같다. 제천시내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날 일찍 박달재에 올랐다. 깊은 숲길로 들어설수록 안개가 앞을 가려 순간 무섬증이 와락 달려들었다. 사람 한 명 없는 숲길을 더듬더듬 걸어올라가면서 귀신이 나오는 건 아닐까, 늑대가 나타나면 어쩌지? 떨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다시 내려갈까 망설이면서도 계속 올라가는 건 어떤 마력이 있는 걸까. 이 길을 박달 도령만 넘진 않았을 게다. 고개 넘어 봉양읍 장날이면 무명 삼베옷 깨끗이 빨아입고 계란 꾸러미며 보릿자루, 콩자루 이고 몇십리 길을 옛 사람들은 걸었을 것이다. 연지곤지 찍고 가마타고 고갯마루에서 친정집을 뒤돌아 보며 눈물 짓던 새악시는 얼마나 많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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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달재 밑은 1997년 4차선 터널이 뚫려 지금은 쉴새없이 차들이 지나다닌다. 다행히 박달재 옛길이 잘 보존돼 있어 언제든지 달려와 옛 정취에 흠뻑 취할 수 있다. 안개가 걷힌 후의 볕 좋은 가을 날씨가 박달재와 주론산 산길을 걷는 데 더없이 좋았다. 곱게 물든 단풍과 쪽빛 하늘은 보색의 대비를 이뤄 그림같이 아름다웠다. 그 숲길을 오직 나 혼자서 걷는다. 나뭇가지를 흔드는 소슬바람과 개울물 소리, 가끔씩 들리는 산새들의 퍼덕거리는 날갯짓이 동무가 돼 줬다. 목마르고 허기질 때마다 물과 귤을 까먹으며 한참을 올라가자 황동재란 고갯마루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황동재를 넘어가면 베티 성지가 나온다. 아쉽구나. 박달재 밑 백운면소재지 차부에 고구마 보따리를 맡기고 왔으니 다시 내려가야 한다. 전날 의림지에 갔을 때 그 동네 사는 최동석 할아버지(80)가 준 빨간 고구마는 알이 어찌나 굵고 실한지 노다지를 캔 기분이었다. “내가 테레비에도 몇 번이나 나온 사람여. 내 나이가 팔십인데 해마다 철인 3종경기, 반기문 마라톤에 나가고 있어.” 그러고 보니 근육으로 다져진 할아버지 팔뚝이 젊은이 저리가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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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달재 아랫동네는 지대가 높아 겨울엔 유난히 춥다. 강원도 산간지역에 왔나싶을만큼 맹추위를 떨쳐 온 몸을 꽁꽁 싸매고 살아야 한다. 그만큼 공기 맑고 땅 기름지고 물 맑아 사람 살기에 좋다. 낮밤의 기온차가 커 이 지역 특산물인 사과는 새콤달콤해 서울 농산물시장에서 으뜸으로 쳐준다. 그래서인지 도시에서 귀촌한 사람들이 많다. 수원에서 7년전에 백운면으로 귀촌한 김춘애씨(62) 부부는 박달재로 여행왔다 귀촌한 경우다. “여기가 겨울에 좀 춰서 그렇지 살기 너무 좋아요. 동네사람들 텃세도 있었지만 맘 터놓고 대하니까 금방 친해졌어요. 이것도 인연인데 우리집으로 갑시다. 재워 줄게요.” 헌데 주인부부는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다. TV도 종교방송만 틀어놓고 밥상머리에서도 설교 듣느라 밥을 코로 먹는 줄 알았다. 아뿔싸! 내가 걸렸구나(ㅋㅋ). 친구 O한테 우여곡절을 문자로 보냈더니 신나 죽겠다는 듯, 사이비종교 광신도일 지 모르니 조심하라고 겁을 팍 주는 게 아닌가. 급기야 한밤중 교회에 끌려가(?) '주여, 주여'를 외치다 하마터면 안수기도까지 받을 뻔 했다. 열심히 회개한 덕분인지 그날 밤은 포근한 이불 속에서 달게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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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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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편 채널에서 나오는 '나는 자연인이다'를 즐겨본다. '자연인'들은 산 속에서 혼자 사는 사연은 제각각이지만 산 아래 정글같은 살벌한 세상에서 상처받고 누더기가 돼 들어온 사람들이다.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비로소 마음의 안식을 찾은 그들을 보면 나 역시 행복해진다. 꼭 한번 살고 싶은 곳 제천! 졸린 눈을 비비는 나를 교회에 데려가 개종시키려 한 건 당황스러웠지만 정 많은 귀촌인 부부와 박달재 옛길을 못 잊을 것 같다. 아 참, 의림지 할아버지가 고들빼기 캘 때 또 오라고 하셨는데….
▲가는길=대전역에서 아침 첫 기차가 6시 5분으로 무궁화호와 누리로를 포함해 하루 8번 있다. 2시간 걸린다. 버스는 복합터미널에서 첫차가 8시 32분으로 3시간 30분 걸린다.
▲먹거리=제천은 산과 물이 어우러져 먹을거리가 풍부하다. 청풍호에서 잡히는 송어회와 쏘가리·메기 매운탕이 일품이다. 산이 깊어 약초가 많아 약선음식이 유명하다. 능이버섯 전골, 더덕, 도토리로 만든 요리가 있다. 산채비빔밥은 덤이다.
글·사진=우난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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