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제협 논산문화원장이 죽림서원에서 참가자들에게 역사해설을 하고 있다. |
논산시에 가면 근현대사의 변화 과정을 한 번에 목격할 수 있다.
논산 강경읍은 현재 북한의 원산시 원산항과 함께 조선 2대 포구였으며, 전국 3대(강경, 대구, 평양) 시장을 보유한 최대 규모의 상업도시였다.
논산 강경포구는 충청의 상징인 금강과 함께 번영과 쇠락을 같이하기도 했다.
23일 오전 10시. 억새와 갈대가 가득한 금강줄기 강경천변에 땅을 흔드는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충남문화재단의 '이제는 금강이다' 네 번째 날, 논산 탐방을 알리는 소리다.
이 날은 행사에 함께 한 황명선 논산시장의 말처럼 “반은 추수가 끝나고 반은 아직 노란 들녘으로 남은 깊어가는 가을”을 만끽할 수 있었다.
금강변에서 멀지 않은 죽림서원과 임리정, 강경젓갈시장, 옥녀봉을 지나는 길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고이 간직하고 있다.
옛 강경노동조합(강경역사문화안내소)과 옛 한일은행(강경역사박물관) 건물, 일부 부서진 근현대 건축물 등이 그대로 남아 있거나 재현됐다.
강경영사문화안내소를 방문하면 강경과 강경노조의 역사에 대해서도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안내소에 따르면 강경노동조합은 한국 최초의 노조다. 1915년께 설립돼 1925년 노조 건물을 신축했다.
노조는 땅과 돈을 모두 빼앗긴 상황에서 한국의 노동자들(지게꾼, 하역 중심)이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설립했다. 동종업종 간 경쟁을 금지하고 업무를 조율했으며, 기관과의 연락 및 협의를 담당했다.
범국민적 자립 실천 운동인 물산장려운동과 국채보상운동, 야학, 식민지화 반대 활동 등을 주도했다.
당시 2500여 명의 조선 노동자들은 서로 뭉치고 협력함으로써 서슬 퍼런 일본인들에 맞섰다.
강경노조 이후 수협과 농협 등이 생겨났다.
강경은 금강의 역사이기도 하다.
과거 철로와 도로가 있기 전 큰 배가 강경포구까지 들어와 해산물 등이 작은 배로 옮겨져 공주 등 전국 각지로 흩어졌다. 지게꾼 등 하역 노동자들이 많았던 이유다. 동시에 일본군은 우리 쌀과 식량 등을 금강을 통해 가져가기도 했다.
강경에서는 일제시대 12개의 일본계 은행과 1개의 한국계 은행이 영업하기도 했다. 당시 은행에는 커다란 창고가 있어 돈을 빌려주면서 수산물과 건어물을 담보로 보관했다. 그러나 강경은 철로와 고속도로가 건설되면서 금강과 함께 쇠퇴했다.
한편 논산 곳곳을 탐방하면서 이종원 충남문화재단 대표이사는 충청정신과 백제정신을 강조했다.
그는 “백제가 황산벌에서 마지막으로 신라 화랑들과 전투를 벌였는데 우리는 누구를 더 따르고 배울 점이 많은 정신적 지주인지 생각해야 할 때”라며 “백제의 후예들은 마음 속에 계백 장군이 더 남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내포=유희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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