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 후 적어도 10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평가를 통해 팡테옹에 안장할 위대한 인물인지 결정하게 된다.
팡테옹에 이러한 시간적 유예를 두는 전통이 만들어진 것은 팡테옹 지하분묘 첫 안장자이자 3년만에 축출당한 프랑스 혁명지도자 미라보에서 시작됐다.
미라보는 루이16세에 맞서 국민의회를 수호하고 프랑스 혁명의 에너지를 확산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지도자이면서 혁명이 완성되기 전인 1791년 4월 사망했다.
당시 새롭게 건립한 생트 주느비에브 성당(현 팡테옹)을 혁명의 위대한 인물들이 안장되는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회의 결정에 따라 미라보의 시신은 주느비에브 성당 지하분묘에 안장했다.
이로써 미라보는 팡테옹에 안장된 최초의 인물이 됐고, 이를 계기로 생트 주느비에브성당은 자유 프랑스의 위대한 인물들의 유골을 안치하는 팡테옹 건립 법률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됐다.
성당에서 위대한 인물이 잠든 영묘로 용도 변경된 팡테옹은 왕의 군주로 대표되는 프랑스 구질서를 종식시키고 혁명적 질서의 위대함을 상징하고 국민적 기억의 전당이 되어 갔다. 같은 해 프랑스혁명의 사상적 기초를 세운 볼테르의 유해가 팡테옹에 안장됐고, 입법의회 의장으로 귀족적 특권 폐지에 앞장선 르플르티에가 루이16세 근위병에게 살해돼 1973년 역시 팡테옹에 안치됐다.
이 와중에 혁명의 가치와 국민적 기억의 전당이 될 팡테옹의 첫 안장자가 묘지에서 축출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1792년 11월 국민공회가 왕의 재판 문제로 논쟁하던 때 발견한 상자에는 미라보와 루이16세 사이 주고받은 반혁명 모의가 담겨 있었다.
미라보가 왕의 군주권 수호를 약속한 반혁명적 문서가 미라보의 사망과 팡테옹 안치 후 발견되면서 미라보는 1794년 9월 팡테옹에서 축출돼 다른 공동묘지에 매장됐다.
이를 계기로 팡테옹에 안장하려는 혁명가는 적어도 정치적 검증을 위해 10년이라는 기간을 기다린 후에 안장여부를 결정하는 전통이 만들어졌다.
팡테옹에 안장할 인물을 결정하기 위해 사망 후 10년의 시간적 유예기간을 두는 전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삼총사'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의 시신은 2002년 팡테옹 지하분묘에 안장됐는데 사망 32년만에 이장된 것이며, 레지스탕스의 최고 지휘관으로 활약한 피에르브로솔레트(1903~1944)는 지난해 팡테옹에 안장됐다.
팡테옹은 또 프랑스 성녀 생트 주느비에브의 유골함까지 축출해 종교성이 완전히 사라진 곳이 되었다가 지도자의 결정에 의해 사제들에게 헌정되면서 종교시설로 회귀하는 역사를 반복했다.
황제 나폴레옹의 등장과 그의 결정에 의해 팡테옹은 종교와 묘역이 공존한 기존의 형태로 회귀했다.
1799년 나폴레옹은 그해 제정된 헌법에 따라 통령정부의 제1통령으로 임명되면서 칙령을 통해 팡테옹을 종교와 정치라는 이중의 기능을 수행하는 공간이 되었다.
이에다라 팡테옹 지상부는 노트르담성당 신부들의 미사 장소로, 지하분묘는 제국 관리들의 안장소로 사용됐다.
다시 루이 18세가 프랑스의 새로운 군주로 결정되면서 부르봉 왕가의 복귀를 알렸고 팡테옹 역시 다시 변화를 맞는다.
팡테옹 안에 있던 보나파르트 정부를 상징하는 모든 문양과 숫자들을 없앴고, 팡테옹이자 성당을 사제들에게 헌정하는 결정을 내렸다.
루이 핍립은 팡테옹에 십자가를 끌어내려 다시 혁명의 묘지로 복귀했으나 1851년 루이 나폴레옹은 '조국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라는 소벽 문구를 제거하고 종교적 공간으로 복원했다.
팡테옹이 자유 프랑스 공화국의 묘지인가 또는 성당인가를 둘러싼 논쟁은 1885년에 들어서 종결될 수 있었다.
레미제라블, 노트르담의 꼽추 등 수많은 문학작품을 남기고 1851년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에 항거한 빅토르 위고가 팡테옹에 안장되면서 공화국의 묘지로서 국민적 호응과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1889년 혁명 100주년 기념일을 기해 4인의 위대한 인물이 팡테옹에서 안장식이 거행된 이래 프랑스 정부는 팡테옹에서 안장할 위대한 인물을 지속적으로 찾아내고 있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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