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현경 한밭도서관 사서 |
다윈의 '종의 기원'이 생물의 진화론을 밝혀냈다면 정유정의 '종의 기원'은 한 인간 속에 감춰져 있던 악의 진화를 보여준다.
▲ '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은행나무, 2016 |
소설 속에서 유진은 피비린내로 깨어난다. 문밖을 나온 유진은 부엌에서 예리한 흉기로 살해된 엄마를 발견한다. 피범벅이 된 옷과 주머니에서 나온 면도칼, 여러 정황증거가 유진을 살해범이라고 지목한다. 그렇지만 유신에게는 아무런 기억이 남아 있지 않다. '도대체 왜?'라는 질문 속에서 유진은 망각의 늪으로 빠져버린 지난밤의 기억을 되살려낸다.
유진은 며칠째 약을 먹지 않았다. 발작억제제를 먹으면 언제나 끔찍한 두통과 이명과 무력증이 몰려왔다. 약을 끊은 덕분에 온몸이 가벼워져 밤 운동을 나갔다. 빗속에서 여자를 보았던 것도 같다. 발작이 일어날 것 같아서 서둘렀다. 자신을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도 기억처럼 들려왔다.
지난밤 한 여자를 뒤쫓다가 살해했다. 그 현장을 엄마가 보았고, 집에 돌아와 엄마와 다툼이 있었다. 엄마를 말리려다 살해하게 되었다. 이제 곧 해진이 집에 돌아올 테고, 이모도 엄마를 찾고 있다. 살해현장을 감추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러다가 엄마의 노트를 발견하고 16년 전 사건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엄마의 노트에는 유진이 10살 때 있었던 사고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가족여행으로 떠난 바닷가에서 유진의 형과 아버지가 익사사고를 당했다. 이모는 그날 일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게 아니라 사이코패스이자 포식자로서 유진이 처음으로 '해치운 짓'이라고 했다. 아이가 무탈하고 무해한 존재로 평범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평생 약을 복용해야 한다고 했다. 유진이 지금껏 간질약이라고 알고 먹었던 약이다.
유진은 엄마와 이모가 자신에 대해 왜 그렇게 심하게 억압했는지를 알게 된다. 그토록 원하던 수영도 금지했고, 약 복용을 유난스럽게 체크했던 것, 밤 9시 전 귀가와 외박, 음주 금지 등등. 억압에서 풀려난 유진은 점차 사이코패스로서 각성해 간다.
'종의 기원'은 묻지 마 범죄와 존속 살해 같은 잔인한 범죄들을 다루고 있다. 이런 끔찍한 책을 좋아하지 않는데도 끝까지 놓을 수가 없었다. 책을 덮고 난 후, 수많은 질문이 마음을 짓누른다.
유진의 엄마가 조금 더 아이를 믿어주었다면, 7살 아이의 그림을 보고 이모가 잠정적 범죄자라고 낙인찍지 않았더라면, 유진이 수영을 계속할 수 있게 해줬다면, 약을 먹이지 않았더라면, 혹은 솔직하게 무슨 약인지 알려줬더라면, 해진이 조금만 더 눈치가 있었다면 달라질 수 있었을까?
유진은 얼핏 '28'의 동해와 비슷해 보인다. 둘은 모두 부모의 학대와 차별 속에서 사이코패스로 성장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작가는 유진을 일인칭으로 그려내고 있다. 독자들은 소설 속 화자에게 동일시되고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악인에게 공감하고 연민을 느끼게 하는 소설이라니. 고약한 기분마저 든다. 그러나 극 중 유진에게 복잡한 감정과 연민을 느낀다는 건 사이코패스에게 속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사이코패스는 보통사람들과 다르게 세상을 특정한 방식으로 인식한다고 한다. 공감능력 부족과 죄의식 결여, 지나친 자기중심성 등은 사이코패스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그들은 외계에서 뚝 떨어진 생명체처럼 일반사람들과는 다른 종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내면에도 어느 정도 어두운 본성이 숨겨져 있다. 내면의 악을 똑바로 응시하고 이해해야 타인의 악, 포식자의 악에 제대로 대처할 수 있다. 이것이 작가 정유정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메시지일 것이다.
이현경 한밭도서관 사서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