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 제1증약터널(왼쪽)과 회덕터널(가운데), 옛 구정리터널(오른쪽) 모습. |
3개 터널로 구성…동구 세천동ㆍ신상동 위치
인부 수백명 밤낮으로 동원… ‘선조 한 서린 곳’
1919년 철도 선형개량공사로 폐쇄된 후 방치
말굽 모양 터널아치, 일본 내 터널들과 비슷해
1905년 경부선철도가 준공될 시기에 대전에는 여러 개의 철도터널이 생겨났다.
그중 가장 오래되고 역사적 의미가 있는 터널은‘옛 증약터널’이다. 경부선 전체 노선에서도 최고(最古) 터널로 알려졌다.
대전의 철도문화유산 자료에 따르면 증약터널은 1904년 말에서 1905년 초 사이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 구조와 형태가 원래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어 당시 건축과 철도기술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이 터널은 경부선철도 개통 때 대전역과 부산방면의 증약역 사이에 부설된 철도터널로 지금의 동구 세천동과 신상동에 위치해 있다. 제1ㆍ2ㆍ3터널 등 총 3개의 터널로 구성돼 있다.
하지만, 1919년 곡선 구간을 직선형으로 개량하는 공사가 시행된 후 폐쇄돼 터널로서 역할을 마감했다. 증약터널의 남쪽에는 철도 직선화를 통해 새로 건설된 길이 1㎞의 세천터널이 자리하고 있다.
경부선과 호남선 철도는 빠른 개통을 위해 속성으로 공사가 진행돼 개통된 뒤에도 보수ㆍ개축공사가 계속됐다고 한다. 경부선철도는 기한 내 공사를 마치기 위해 험난한 산을 뚫기보다는 곡선으로 돌아가는 철로를 만들었다.
이후 철도 직선화 과정을 거치면서 증약터널처럼 폐쇄돼 사용하지 않는 터널이 발생했다.
총 3개로 구성된 증약터널은 세천리에서 증약으로 넘어가는 산모퉁이에 제1ㆍ2증약터널이 위치해 있고 이곳에서 더 지나면 마달령 부분에 제3증약터널이 자리한다.
1904년 제작된 당시 문서를 보면, 제1ㆍ2ㆍ3 증약터널의 길이는 각각 90.5m, 160.9m, 261.5m로, 이 구간은 최대의 난공사 구간으로 암석이 견고해 수백명의 인부가 밤낮으로 동원된 것으로 전해져 우리 선조의 한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이중 제1증약터널은 서쪽 입구와 동쪽 입구, 터널 내부 등의 원형이 가장 잘 보존돼 있다. 대전에서 증약 방면으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으며 가장 짧지만 가장 중요한 터널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서쪽입구 상부에는 건설 당시 주한 공사였던 ‘하야시 곤스케’가 휘호한 액석이 설치돼 있을 정도다.
폐쇄된 이후에도 한동안 지역주민들의 통행로로 사용되다 지금은 사용되지 않고 있다. 서ㆍ동쪽 입구 모두 말발굽 아치 모양을 취하며 측벽은 화강석, 아치는 벽돌로 만들어졌다. 화강석은 상태가 양호한 편이지만 벽돌은 세월의 힘에 못 이겨 많은 부분이 파손됐다. 입구 주변에는 한국전쟁 때 탄환의 흔적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제2증약터널 역시 개인에게 매각된 뒤 창고로 사용되다 지금은 폐쇄됐다. 제3증약터널은 1970년대까지 대전과 옥천을 오가는 차량이 다니기도 했지만 대전~옥천 간 국도가 뚫리면서 폐쇄돼 지금은 창고로 쓰이고 있다.
증약터널 외에도 대전에는 옛 구정리터널(1919년, 1939년)이 있다. 또 증약터널의 선형개량공사로 만들어진 세천터널(상행선 1919년 10월, 하행선 1939년 10월), 경부선 개통 때 조성된 회덕터널(상행선 1904년, 하행선 1938년), 옛 마달령터널(1905년) 등이 있다. 호남선철도 개통에 맞춰 1913년 건설된 옛 사진포터널은 1978년 대전~익산 구간 선형개량 및 복선화공사로 폐쇄됐다.
일제강점기 일제에 의해 경부선과 호남선철도의 공사가 진행됐기 때문에 한반도에 설치된 철로와 터널들은 일본에 지어진 철도터널과 유사하다. 말굽 모양의 아치가 대표적이다.
이희준 대전대 건축학과 교수는 ‘증약터널과 하야시 곤스케 액석에 관한 연구논문에서 “옛 증약터널과 ‘하야시 곤스케의 액석’은 건축 및 철도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철도문화유산”이라며 “일제가 한국인들의 신앙과 문화를 짓밟으며 경부선철도 건설을 강행했던 역사적 사실들을 증명해 주는 매우 소중한 ‘역사적 장소’라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박태구 기자 hebala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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