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 공옥진 여사의 생전 공연 모습/사진=연합db |
공옥진의 춤은 처절했다.
온몸을 비틀고 꼬며 표현한 몸짓은 자신의 지나한 삶을 담고 있는 몸부림과도 같았다.
“지지리도 복 없이 태어난 내 운명”이라는 생전의 말처럼 기구했던 팔자를 속으로 삭이고 몸으로 뿜어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춤은 소박했다. 하얀 저고리와 쪽찐 머리, 그리고 운신할 공간과 관람객만 있으면 됐다. 단출한 무대에서 몸 하나로, 때로는 병신이 되고 때로는 꼽추와 고양이가 돼 사람들을 웃기고, 울렸다. 어쩜 세상 풍파를 겪어 봤기에 사람의 감정의 끝에 닿아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1931년 8월 14일 전남 영광에서 태어난 공옥진은 일곱 살이 되던 해에 1000원에 팔려갔다.
자신을 판 사람은 최고의 명창으로 알려진 아버지 공대일 이었다. 아버지는 징용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공옥진의 몸값으로 1000원을 받아 징용에서 빠져나오는 데 썼다. 몸종으로 팔려간 곳은 일본에서 활동하던 무용가 최승희 밑이었다.
▲ 2012년 7월 9일 별세한 '1인 창무극' 공옥진 여사가 생전에 살던 전남 영광읍 교촌리 예술연수소에는 공 여사가 사용한 골동품이 남겨져있다./사진=연합db |
먼 타국에서 어린 소녀 공옥진은 최승희의 혹독한 시집살이를 견디면서 문틈으로 그녀의 춤을 훔쳐 배우기도 했다. 최승희는 공옥진이 춤을 배우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가르쳐 주기도 했으나, 오래지 않아 다른 곳으로 팔아버렸다. 일본이 패망하기 전까지 종살이는 계속됐고, 다시 돌아온 고국에서도 삶은 신통치 않았다.
아버지로부터 조부 때부터 내려오는 심청가와 흥부가를 배웠다. 경찰관과 결혼도 했다. 그러나 딸 하나를 낳고 살다가 6.25 때는 인민군에게 끌려가 죽을 고비를 넘겼는가 하면, 지리산으로 들어가 3년이 넘는 시간 비구니가 돼 ‘수진스님’이 되기도 했다.
병신춤은 공옥진의 이런 굴곡진 인생이 녹아든 춤이었다. ‘병신춤’이라는 말을 싫어한 이유였으며, 더 큰 내막은 그에게 벙어리 남동생과 꼽추 조카딸을 잃은 아픔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4년 전인 2012년 7월 9일 공옥진은 생을 마감했다. ‘1인 창무극’의 일인자였지만 죽기 2년 전에야 전남 무형문화재가 됐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춤, 그러나 마지막까지 그는 춤꾼이었다. 그가 남긴 유품에 쌓여 있는 먼지만큼이나 정겨웠던 춤은 이제 우리 기억 속에 남아있다./김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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