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녹원 |
무더위가 눅진하게 달라붙는 날
여름비가 촉촉한 죽녹원엔
나무도 풀도 아닌 채 하늘향해
지조있게 서있는 대나무 사이로
어린시절 추억이 숨어들고…
전국서 가장 아름다운 숲 관방제림엔
세상 모든 풍미가
눅진하고 끈적한 무더위가 살갗에 거미줄처럼 착 달라붙는다. 비가 얼마나 오려고 그러는지 두터운 잿빛 구름이 무겁게 가라앉아 음산한 기운을 풍긴다. 새벽 6시 5분 광주행 기차를 기다리며 빗방울이 떨어지는 하늘을 보면서 우산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오늘 비가 올 게 뭐냐며 투덜거리다 지난해 가뭄을 생각하곤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래, 비오는 날의 여행도 색다를 거야. 얼마나 운치 있을까. 비내리는 대숲에서의 고즈넉함을 생각하자 기차에 오르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래도 장대비는 좀 곤란한데….
다행히 광주역 바로 뒤에서 담양가는 시내버스가 있어서 헤매는 일은 없었다. 차창에 쉴새없이 물방울이 맺혀 흘러 내리는 걸 보며 문득 비를 맞고 싶은 충동이 인다. 봄비도 아니고, 가을비도 아니고, 겨울비는 더더욱 아닌 여름비가 내리면 몸이 근질근질해진다. 마치 잠자던 세포가 살아나는 느낌이 들어 인적 없는 바닷가 백사장이나 숲속에서 맨몸으로 비를 맞으면 어떨까 상상하며 황홀감에 젖게 된다. 때마침 버스에 설치된 라디오의 음악프로에서 샹송 '빠롤레 빠롤레 빠롤레'가 흘러나온다. 알랭 들롱과 달리 다의 흑설탕처럼 달달한 저음의 목소리가 촉촉히 내리는 여름비에 녹아들어 참을 수 없이 나른해진다. 새벽 일찍 일어난 탓에 덜컹거리는 버스에 몸을 맡기자 어느새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천근만근 눈꺼풀을 들었을 때 운전기사 머리 위에 달린 거울에서 기사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운전기사의 표정이 딱 이랬다. '저렇게 인사불성으로 졸다 내릴 데서 제대로 내릴랑가 모르겄네. 참말루 걱정스럽소잉.'
▲ 관방제림 |
▲ 메타세콰이어길 |
역사상 위대한 여행자들과 마찬가지로 이 보잘 것 없는 여행자도 내면에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불같은 영혼을 진정시키려 길을 떠난다. 나의 몸은 결코 쉬는 걸 용납하지 않는다. 그저 더 멀리 가고 싶은 간절한 욕구를 품고 살았다. 산 너머 저쪽 세상엔 여기엔 없는 새로운 것들이 있을 거라며 날마다 희망을 품었던 유년의 동경은 지금도 유효하다. 길을 나설 때마다 나는 지상의 마지막 유랑인이라고 생각했다. 허나 언제나 나보다 더 미친 천상의 방랑자가 있다는 걸 생생히 목도한다. 나의 긍지가 터무니없는 오만이란 걸 깨닫게 된다.
글·사진=우난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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