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감이 흐르는 고3 교실 정면에 급훈이 눈에 띈다. '우리 엄마도 계모임에서 말 좀 하자' 꾸벅꾸벅 침 흘리며 졸다가도 저 문구 한 번 보고 마음을 다잡는다는 학생들. 각자 책상에는 이보다 더 심장이 쫄깃해지는 문구가 붙어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 하지만 연봉은 성적순이다'는 현실반영형부터 '아버지는 망하셨지~ 인생을 즐기다~'는 패러디형까지. 과거 '할 수 있다', '성실한 사람이 되자' 등의 급훈이 요새 업그레이드돼 재기발랄함을 넘어 절절함마저 묻어난다. 어떤 이는 이러한 급훈이 오로지 대학 입시 준비에 내몰린 고3학생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마냥 웃을일만은 아니라고 한다. 무한경쟁의 현주소를 반영한 '고3 급훈'을 살펴본다. <편집자 주>
▲시대 흐름에 따라 급훈도 변했다=80년대는 인성을 강조한 '성실, 근면, 정직, 슬기, 질서' 등이 급훈의 단골 메뉴였다면 90년대 말부터 '고3=입시' 성격이 강해지면서 현실을 반영한 다양한 급훈이 쏟아져 나왔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 덕선이네 고3 교실에 붙어있는 '포기는 배추 셀 때나 하는 말이다' 급훈이 전파를 탔다. 포기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 외에 '최선을 다하여 최고가 되자',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계획보다 중요한 건 실천' 등의 문구가 교실에 자리했다.
2000년대에 진입하면서 급훈은 경쟁 일색으로 바뀌었다. 입시 위주의 교육이 강화되면서 모든 급훈에 '좋은 대학을 가야만 한다'는 속뜻이 내포돼 있다. 문구도 자극적이다.
'죽도록 공부해도 죽지 않는다', '네 성적에 잠이 오냐', '개같이 공부해서 정승같이 놀자' 등이 그 예다. '재수없다'는 수능을 다시 한 번 준비하는 '재수'(再修) 를 하지 않고 한 번에 대학에 가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2호선 타자'는 서울지하철 2호선에 서울대, 연세대, 한양대, 이화여대 등 서울의 주요 대학이 있는 것에 착안한 급훈으로 상위권 대학은 서울에 있다는 '대학 서열주의'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관찰형부터 협박형까지, 유형별 급훈=급훈의 유형은 크게 '관찰형', '패러디형', '협박형' '직설형'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공통점이라면 모두 입시경쟁으로 인한 세태를 반영했다는 것이다.
우선 '관찰형' 급훈에는 '담임이 뿔났다', 'CCTV 작동중', '쟤 깨워','엄마가 보고 있다' '칠판이 남자다', '칠판을 원빈처럼, 교과서를 강동원처럼' 문구에 교사나 가족, 좋아하는 연예인의 사진을 붙여놓는 게 특징이다.
'패러디형'은 가요나 드라마, 영화 제목 등을 바꾼 유형으로 온라인상 유행어인 '그러라고 사준 컴퓨터가 아닐텐데'를'그러라고 보낸 학교가 아닐텐데'로 패러디 했다.
또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를 '지금 (대학에) 다니러 갑니다'로 바꿔 눈길을 끈다. '네 얼굴에 공부 못하면 NO답', '그 얼굴에 공부까지 못하면 안습이다', '10분 더 공부하면 마누라 외모(남편의 직업이)가 바뀐다', '공주되어 왕자낚자', '대학가서 미팅할래 공장가서 미싱할래' 등 협박형 급훈은 학생들의 경쟁의식을 더욱 부추긴다.
자신의 경제·사회적 조건과 위치에 따라 아내나 남편의 등급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 밖에 해석이 필요한 '4행시 급훈'도 있다.
한우갈비는 '한마음으로 우리는 갈수록 비상한다', 우주정복은 '우리는 주마다 정석을 3번 복습한다'는 뜻이다.
'직설형' 급훈으로는 '수능 대박', '합격증 휘날리며', '올인' 등이 있다.
급훈이란 학급에서 교육 목표로 정한 덕목이다. 보통 담임교사가 급훈을 정했지만 요즘은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해 정한다.
이 과정에서 일부 급훈은 진지함보다는 성별과 직업, 학력 등을 희화화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자극제가 된다는 한편, 비교육적인 문구로 인격 형성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고3, 아름다운 미래를 설계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인만큼 미래지향적인 급훈을 만드는 노력도 필요한 이유다.
성소연 기자 daisy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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