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고 유익한 내용으로 독자들에게 사랑받은, 추억의 코너를 되살려보기 위해 ‘송교수의 재미있는 우리말 이야기’ 시즌 2를 시작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변함없는 성원과 관심을 부탁드립니다.<편집자 주>
▲ MBC 드라마 '다모' 자료사진. |
조선조의 여자 경찰관을 다모茶母라고 불렀다. 이 다모는 한국 역사상 최초의 여자 경찰관인 셈이다. 그런데 우리가 다모라 하면 언뜻 다방의 마담쯤으로, 아니면 포청에서 차를 심부름하는 사환이나 여자 심부름꾼으로 생각하기 쉽다. 조선조에서 다모의 직책이 본래 관청의 식모 노릇을 하는 천비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다.
조선조에는 포교나 포졸들이 여인들이 범죄를 수사하는 데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남의 집 내정에는 함부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다모로 위장시킨 여자 경찰관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모로 위장한 비밀 여자 형사인 셈이었다. 이렇게 위장 수단으로 쓰였던 다모가 차츰 여자 경찰관이라는 명칭으로 굳어졌던 것이다.
다모의 자격 기준은 키가 5척이 되어야 하고 막걸리 3사발을 단번에 마셔야 하며, 쌀 5말을 번쩍 들어야 했다. 또한 시아버지나 남편의 이름을 서슴없이 불러야 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아마 기운이 세고, 남성적이며, 괄괄한 성격의 소유자를 선발했던 것 같다.
이 다모는 포청 외에 형조, 의금부에도 있었는데 다모의 주된 임무 중의 하나는 가택수색이었다. 예전에는 남의 집 내정은 남자들이 못 들어가는 법이지만, 다모는 여자라 아무 집이나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집의 종이나 식모 등을 자유롭게 유인하여 정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모는 대개 역적 모의를 하는 집에 많이 갔다. 그들은 치마 속에 60cm 정도 되는 쇠도리깨와 죄인을 묶을 때 사용하는 오라를 숨겨 차고 다녔다. 그러다 그들은 죄가 분명한 사람의 집이라 확증이 되면 도리깨로 들창을 부수고 들어가 죄인을 묶어서 올 수 있었다.
다모는 신분증이 비슷한 통부를 꼭 가지고 다녀야 했다. 이 통부는 길이가 2치쯤 되고 두께가 1푼쯤 되는 단단한 나무 조각의 중간에다 포장의 수결 즉 현재의 사인을 새기고, 그 수결이 있는 곳을 양쪽으로 쪼개어서 한 쪽은 다모가 가지고 다니었으며, 다른 한 쪽은 포장이 가지고 있었다. 다모가 죄인을 잡을 때나 꼭 신분을 밝힐 필요가 있을 때는 이것을 보여 신분을 확인시켰으니, 오늘날 신분증과 같은 것이었다.
이 통부는 주로 평민층을 잡을 때에만 사용했고, 양반은 감히 잡지 못했다. 양반을 잡는 데는 자주통부를 보였는데 이것은 대궐 안에서 임금의 명을 받는 선전관청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다 중대한 일이 생기면 선전관이 임금께 아뢰고 나서 포교에게 내주었다. 표교는 한번 자주통부를 받으면 다시 반환하지 않고 포교직을 그만둘 때까지 가지고 다니었고, 그 자주통부를 받은 포교는 팔을 뽐내면서 양반도 무섭지 않은 양 거들먹거렸다.
다모는 도리깨를 가지고 범인 집의 들창문을 부수고 들어가기도 하지만, 만약 사람을 쳐서 죽여도 살인을 하였다고 처형당하지는 않았고 다만 귀양을 가는 정도에 그쳤다.
따라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 다모는 오늘날 우리 여자 경찰의 효시인 셈이다.
/송백헌 충남대 국문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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