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고 유익한 내용으로 독자들에게 사랑받은, 추억의 코너를 되살려보기 위해 ‘송교수의 재미있는 우리말 이야기’ 시즌 2를 시작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변함없는 성원과 관심을 부탁드립니다.<편집자 주>
▲ 게티 이미지 뱅크 |
정도나 상태가 고만고만한 것을 놓고 사람들이 어느 것이 나으니 못하니 하고 서로 다툴 때 이르는 말이 ‘도토리 키 재기’이다.
그런데 이 말은 본래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던 것이 아니라 団栗の背くらべ[donguri no sekurabe]라는 일본 속담을 그대로 번역하여 사용한 것이다.
본래 이 말의 본뜻은 능력이나 재주가 변변치 못한 두 사람이 서로 네가 나으니, 내가 나으니라며 다투는 것을 비유한 말인데 일제 강점기에 일본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해했던 것을 우리가 여과 없이 받아들여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도토리는 우리가 즐겨 먹는 메밀묵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도토리묵의 원료인 상수리와 도토리 중에 도토리를 가리킨다. 이 도토리는 ‘떡갈나무’의 열매로 그 본래의 뜻은 ‘돼지가 먹는 밤’이다. 즉 16세기에 발간된 최세진崔世珍의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는 도토리를 ‘돝?밤’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 ‘돝?밤’을 분석해 보면 ‘돝+?+밤’이 되니 이 말은 곧 ‘산에 사는 멧돼지(돝)가 먹는 밤’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 ‘도?밤’이 『두시언해杜詩諺解』에서는 ‘도토밤’과 ‘도톨왐’의 두 가지로 표기하고 있다. 이것은 처음의 의미, 즉 멧돼지가 먹는 밤이라는 어원이 흐릿해지면서 도토리의 깍지가 도톨도톨하다는 의미와 연결시켜서 어형을 변화시켰다고 박일환은 설명하면서 “그 뒤 ‘토톨왐’이 ‘도톨암’으로 변하고 이윽고 끝음이 떨어져서 ‘도톨이’로 불리어지다가 지금의 ‘도토리’로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박일환, 우리말 어원사전).
이 변천과정을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도?밤 > 도톨왐 > 도톨암 > 도톨이
한편 도토리묵의 또 다른 원료인 상수리는 본래 참나무橡의 열매實를 말하는데 참나무의 열매 즉 상실橡實이 뒤에 ‘상시리’로 다시 ‘상수리’로 변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 변천과정을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상실 > 상실이 > 상시리 > 상수리
이 도토리와 상수리를 박일환은 13세기에 발간된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에 상실橡實을 ‘돝의 밤’이라 표기한 예를 들어 다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로 원래 산에서 사는 멧돼지가 식용으로 즐겨 먹는 나무 열매라는 사실을 짐작하게 한다고 했다.(위 같은 책)
이 도토리와 상수리를 가지고 만든 묵을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모두 도토리묵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같은 뿌리라는 설도 억설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다만 맛에 있어서는 상수리로 만든 묵보다는 도토리로 만든 묵이 훨씬 맛이 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강로李江魯는 이 도토리와 상수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국어에서 ‘떡갈나무’의 열매는 ‘도토리’이고 ‘상수리나무(참나무)’의 열매는 ‘상수리’인데, 일본어에는 그 열매의 이름이 없다. 또한 일본어에서 ‘도토리나무’의 열매는 donguri団栗인데, 국어에는 그 열매의 이름이 없다. 그러고 보면 사실상 ‘도토리 키 재기’는 donguri no sekurabe団栗のせくらべ란 말을 제대로 번역한 것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도토리와 상수리는 뿌리가 같고 틀리고 간에 그 모양이 서로 다르며, 같은 도토리나 상수리라도 크기와 무게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같은 품종의 열매끼리도 키를 재보면 차이가 많이 나는 것으로 보아 이것이 우리말에는 적합한 속담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우리나라에서는 그 말이 우리말처럼 상식화 되어 사용하고 있다. 그러니 차라리 이와 유사한 것으로 ‘도 찐 개 찐’이라는 속담이 있으니 그것으로 대신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든다.
또한 이 도토리가 각 지역마다 여러 사투리로 불리우는데, 가둑밤(함북), 고투밤(함남), 구람(충북, 강원), 굴밤(경남, 충북, 충청), 굴암(경기), 꼬톨밤(함북), 꿀밤(강원, 경남), 도꾸리(경기), 도톨밤(함경), 도투리(강원), 동고리(제주), 썹밤(평북) 등 그것들이다.
/송백헌 충남대 국문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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