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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라디오 |
그의 말 한마디에 대중은 울고 웃었다. 사람들은 그를 따랐고, 지도자는 그를 신뢰했다.
하지만, 그는 차가웠고 잔인했다. 역사는 결국 그를 희대의 살인마로 기록했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Dr. Paul Joseph Goebbels: 1897년 10월29일~1945년 5월 1일)다. 나치독일의 2인자다. 당 중앙선전부장, 계몽선전장관, 선전부장관, 공보장관 등을 맡을 정도로, 당시 선전선동의 귀재였다.
독일 라인란트에서 가톨릭 집안의 다섯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하지만, 일곱살 때 골수암으로 인한 소아마비로 오른쪽 다리에 장애가 생기면서 주변과 원만한 관계를 맺기가 어려웠다. 가톨릭재단의 장학금 덕분에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며 독일문헌학으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예술가의 꿈을 꾸었지만, 전쟁 등으로 이뤄지지 못했다.
1922년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나치스)에 들어갔다. 1925년 당내 좌파지도자 G.슈트라서의 비서가 됐지만, 슈트라서와 히틀러의 대립이 심각해지자, 이듬해 히틀러에 충성 맹세를 했다. 이후 국회의원, 당선전부장 등을 지냈고 1933년 나치스가 정권을 잡은 후 국민계발선전장관과 문화회의소 총재 등 2인자에 오른 인물이다.
승승장구의 비결은 선전선동이었다.
그는 라디오에 주목했다. 국가 보조금을 지원해 모든 독일인에게 라디오를 보급했다. 베를린의 인기 프로그램 '라디오 아워', 매일 저녁 7시 뉴스에 '오늘의 목소리'란 코너를 신설했고, 밤에는 횃불 행렬 실황을 생중계했다. 이를 통해 히틀러를 훌륭한 지도자로, 유대인은 멸종 대상으로 지목하는 등 국민을 전사로 만들었다. 국민은 라디오를 '괴벨스의 입'으로 부를 정도였다.
이 때문에 괴벨스는 신문과 방송 등 최초로 언론을 정치에 이용한 사람이 됐다. 당시 그와 함께 일했던 일부 사람들과 다른 나라 학자들은 괴벨스식 선전선동과 언론, 대중, 정치 등에 대한 이론 연구를 시작할 정도였고, 현재 학계에서 가장 유용한 이론과 학문체계로 자리 잡았다.
그는 결국 히틀러가 목숨을 끊은 다음날 총리 관저의 대피호에서 6명의 자녀를 독살하고 아내와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악의 화신으로 기록됐다.
“나에게 한 문장만 달라. 누구든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 사람들은 한 번 말한 거짓말은 부정하지만, 두 번 말하면 의심하고, 세 번 말하면 이내 그것을 믿게 된다. 100%의 거짓말보다는 99%의 거짓말과 1%의 진실의 배합이 더 나은 효과를 보여준다.”
괴벨스가 한 가장 유명한 말이다. 그가 정치가 아닌 예술을 위해 한 문장을 달라고 했으면 세계 예술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윤희진·세종본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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