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마지막 冬畵, 무주 덕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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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마지막 冬畵, 무주 덕유산

내리고 그치는 것이 눈만의 일은 아니겠지요

  • 승인 2016-03-03 13:48
  • 신문게재 2016-03-04 9면
  • 우난순 교열팀장우난순 교열팀장
▲ 향적봉을 오르는 길에 자리잡은 백련사 설경
▲ 향적봉을 오르는 길에 자리잡은 백련사 설경


겨울의 게으름을 떨치듯 오른 산,
깨질 듯이 시려웠던 손발은 호되게 치르는 겨울과의 이별…
살기위해 매일을 견뎌내는 우리는 욕망과 자아와 감정에 휘둘리지만
모든 것은 순리대로, 눈송이는 아무 노력없이 떨어진다




“무주 구천동 주세요.”, “어머, 덕유산 가시나봐요. 오늘 눈 와서 산에 가면 정말 멋지겠어요.” 꼭두새벽 휴대전화 알람소리에 화들짝 깨어 비몽사몽으로 화장도 안하고 온 몸을 중무장하고 나선 덕유산행. 터미널 매표원의 상냥한 미소와 격려에 잠이 확 달아나며 설레기 시작했다. 그래, 오늘 제대로 겨울의 덕유산과 랑데부하겠구나. 겨우내 비염이 있다는 이유로 산을 찾지 않았다. 보문산만 왔다갔다 했다. 에베레스트든 몽블랑이든, 보문산이든 어떤 산이 훌륭하고 시시한 건 아니다. 산은 다 같은 산이다. 그래도 이번 겨울엔 너무 게으름을 피웠다. 해서 히말라야는 못 가더라도 겨울이 가기 전에 설경을 맘껏 감상할 수 있는 겨울산을 가야겠다고 맘먹었다. 이름하여 이번 겨울과의 화끈한 이별식을 덕유산에서 치를 참이다.

이른 아침 구천동 마을은 집앞 눈을 치우는 주민들의 숨찬 소리만이 간간이 들렸다. 서울, 대구, 전주 등 전국 각지에서 왔다는 한 무리의 등산동호회 사람들이 지나가는 나더러 사진 한방 찍어달라고 하고선 혼자 왔냐며 눈이 뚱그래진다. 사람들의 반응에 늘 하는 생각이지만 혼자 산에 가는 게, 혼자 여행하는 게 신기한가. 버스정류소에서 백련사까지 평소 같으면 1시간 걸리는데 눈길을 걷느라 20분이나 초과했다. 적막감이 감도는 백련사는 발자국만 길을 내고 있을 뿐 눈조차 숨죽이며 내린다. 이제 끝없이 오르고 올라야 한다. 삶과 죽음이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듯 산을 오르는 행위도 개인적인 것이다. '산을 왜 오르는가'라는 진부한 질문에 '산이 거기 있으니까 간다'는 답도 이제 식상한 언사가 돼버렸다. 우리는 죽는 날까지 노동에서 헤어날 수 없다.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 인간에게 먹고 사는 일만큼 중요한 게 어딨겠나. 더구나 약육강식의 경쟁사회에서 하루하루 살아내는 건 어마어마한 일이다.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횡경막을 들썩이며 오르기 시작했다. 마스크를 낀 탓에 입김이 고스란히 위로 올라와 안경에 성에가 끼어 눈앞이 뿌옇다. 안경을 벗어 털모자 위에 얹고 걷자니 앞이 안보여 오르는 길이 더욱 더뎠다. 바람에 나뭇가지가 삐걱대는 소리가 숫돌 위에서 칼날 가는 소리처럼 사나웠다. 시베리아 불곰처럼 깊은 숨을 몰아쉬며 뽀얀 떡가루같은 두툼하게 쌓인 눈을 밟을 때마다 나는 뽀드득 소리가 쾌감을 불러일으킨다. 한발한발 오르다 목이 마르면 찰진 눈가루를 뭉쳐 얼음보숭이 먹듯 녹여 먹었다. 폐부 깊숙이 청량한 공기를 들이마신듯 서늘한 기운이 감싸 정신이 번쩍 든다. 드디어 관목이 우거진 겨울왕국에 다다랐다. 정상이 멀지 않았다는 얘기다. 탄성이 절로 나왔다. 뿌연 안개에 휩싸인 눈꽃 나무들은 창백하고 섬세한 크리스털 왕관을 보는 듯해 숨이 막힐 지경이다.

1614m의 향적봉에서 바라본 산아래 세상은 망망대해 아득한 바다였다. 몇 미터 앞만 분간할 수 있을 뿐, 하늘도 땅도 온통 눈과 안개에 휩싸여 유령도시를 떠올리게 했다. 순백의 순결한 세계는 폐소공포증을 불러일으킨다. 대피소에서 컵라면과 김밥을 먹고 산을 내려오는데 손발이 깨질듯이 시려웠다. 순간 눈물이 쑥 빠졌다. 내가 겨울과의 이별식을 호되게 치르는구나. 마흔 살의 짧은 나이를 불꽃처럼 살다 간 잭 런던의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는 자연의 냉혹함이다. 그의 소설들은 생존투쟁에 매혹을 느끼며 그 냉혹성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에게 자연은 '핏빛 이빨과 발톱'이었다. 그 중 '불을 지피다'는 영하 50도의 혹한에 맞서 싸우다 허망하게 죽는 인간을 담담하고 냉정하게 그렸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죽은 말의 배를 갈라 내장을 긁어내고 그 속에 들어가 하룻밤을 버티며 살아냈지만, 런던의 소설 속 주인공은 설원에서 결국 불을 지피지 못하고 대자연에 항복했다. 나는 얼어죽을 일은 없겠지만 미끄러운 눈길을 내려오면서 몇 번이나 고꾸라질 뻔 할 때마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지치고 언 몸을 이끌고 버스에 오른 시각이 4시 50분이었다. 승객은 달랑 나 혼자였다. 버스기사한테 과자를 건네며 이 버스가 내 전용 리무진 같다고 하자 “제가 모시게 돼서 참으로 영광입니다”라고 위트있게 받아치며 박카스 한병, 영양제 네알을 준다. 산에 갔다온 수고라나? 박카스 아저씨의 인정에 추위와 피로에 너덜너덜해진 몸이 금세 회복되는 듯 했다. 문득 '어느 눈송이 하나 엉뚱한 곳에 떨어지는 법은 없다'는 문구가 생각났다. 나는 앞으로도 여전히 똑같은 욕망과 자아와 감정에 휘둘릴 것이다. 자질구레하기 짝이 없는 이해타산과 짜증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모든 것은 순리대로 돌아가고 있다. 눈송이들은 아무 노력없이 그냥 떨어진다.

▲가는길=대전복합터미널에서 무주구천동 가는 버스는 첫차가 7시 20분이고 하루 5번 간다. 1시간 40분 소요. 승용차로는 대진고속도로 무주IC에서 좌회전해서 구천동방향으로 가면 된다.

▲먹거리=향적봉까지 갔다 올 경우 도시락을 싸가는 게 좋다. 시간이 꽤 걸린다. 정상에 대피소가 있어 라면 과자 등도 판다. 구천동엔 식당들이 있어 산채비빔밥, 청국장 등 맛집이 많다.

글·사진=우난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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